리영희 친필원고의 매력② 떨리는 오른손을 꾹 부여잡고 꾹꾹 써 내려간…

올해 12월이면 거짓우상과 독재권력에 맞섰던 언론인이자 지식인, 리영희 선생의 10주기를 맞습니다. 재단법인 뉴스타파함께센터(이사장 김중배, 이하 뉴스타파함께재단)는 리영희 선생의 유가족과 후배 언론인들의 기증을 받아 소장하고 있는 친필원고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친필원고는 나중에 인쇄한 책과 달리, 단어와 문장을 넣고 빼고 옮기고 삭제하는 퇴고의 흔적이 남아있어 집필 과정에서 저자가 가졌던 사유의 얼개와 고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같은 글이라도 친필원고와 함께 출간한 책을 비교해 본다면, 색다른 지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2003년, 잡지 대구사회에 보낸 신년 축하의 글입니다.

평범한 문장도 글 쓴 이가 맞닥뜨려야 했던 구체적 상황을 알고 나면, 그 울림과 떨림이 남달라집니다. 곧 생을 마감하는 사형수가 노모에게 남기는 유언, 먼 전장으로 떠나는 젊은 병사가 아내에게 바치는 송별의 편지는 상투적이고 평범하고 세속적이어도, 절박하고 애타는 마음이 절로 출렁이고 넘칩니다.   

글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글을 쓴 사람의 정체성과 함께 쓸 당시의 개인적, 시대적 상황을 폭넓게 알아야 합니다. 글은 쓴 이의 인생의 구체적 궤적입니다. 화폭에 담긴 그림처럼, 종이 위의 글도 아는만큼 보입니다. 글이 앎으로 이어져야 삶이 됩니다.  

오늘 보여드릴 리영희 선생의 친필원고는 17년 전 짧은 축하의 글입니다. 굳이 원고라고 붙일 것이 아닐 정도입니다. 대구 지역의 민주인사들이 운영하는 잡지 <대구사회>의 2003년 신년호를 축하하는 내용입니다. 한번 훑어 볼까요? 


▲ 리영희 친필원고 (2003년)

계미 癸未 신양 新陽 축원 祝願
계미년 2003년, 첫 봄을 맞아 축원합니다. 

대구사회 무궁 無窮 발전 發展 
<대구사회>지紙의 발전이 끝이 없어라 (무궁하여라)

선도 先導 타파 打破 지역 地域 망존 妄尊
지역주의의 거짓됨을 타파함에 앞장서서  

영호 嶺湖 화호 和好 민주 民主 성세 盛世
영호남이 화합과 정다움으로 민주적 성세를 이루면, 

남북 南北 합심 合心 통일 統一 조국 祖國
남북한이 힘을 합해 마침내 조국통일을 이루리라 .

리영희 근정 謹呈 (삼가 드림) 

네 글자, 네 글자씩 댓구 형식으로 내용은 평범합니다. 새해 흔히 주고받는 연하편지의 덕담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벌써 눈치 채셨나요? 리영희 선생의 필체에 익숙하거나 눈썰미있는 이라면, 피식 웃을지도 모르겠네요. 

글 읽기를 잠시 멈추고 화면을 올려 글을 다시 읽어 보세요. 

미세하게 흔들림이 느껴지나요? 반듯하지 못하고 약간 기울어져 있습니다. 날렵해 보이지 않고 뭉툭합니다. 한 획, 한 획 힘을 주었지만, 왠지 어눌해 보입니다. 일필휘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평소 선생의 필체와 다릅니다. 2003년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찾아와 이 글을 썼을 때, 선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리영희 선생에게 글쓰기는 언어의 조합이 주는 탐미의 향유가 아니었습니다.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였고 “실천적 진실의 추구”였습니다.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는 진실을 끊임없이 좇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려 했습니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야만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 (1977년 한길사)  

선생은 국가권력에 의해 7번 강제연행 됐고 그 중 5번 투옥됐습니다. 3번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았고 합해 4년의 징역형을 살았습니다. 두 번 언론사에서 해직됐고, 8년을 교수직에서 쫓겨났습니다. 독재권력과 거짓권위에 굴하지 않고  ‘고통스런 글쓰기’ 행위를 40년 동안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일흔을 넘기면서 글쓰기를 멈춰야 했습니다. 2000년 11월, 집필도중 리영희 선생은 느닷없이 찾아 온 뇌출혈이라는 손님을 맞고 쓰러집니다. 뇌졸중(중풍)으로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고 사고도 혼미해졌습니다. 언어의 장애도 겪습니다. 글쓰기를 모두 중단하고 건강 회복에 전념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적 활동과 글 쓰는 일은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운명의 선고를 알고 체념하면서 순순히 승복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의 예정표를 어찌 인간이 가늠할 수 있겠는가! 4년이 지나는 사이, 신체와 정신의 마비가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회복되어 갔다.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것이 있는데, 오른손의 떨림과 손가락의 마비다. 글이라면 엽서 한 장의 짧은 글을 힙겹게 쓰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대화 > (2005년 한길사) 

글쓰기의 ‘고통스런’ 멈춤이 계속되던 2003년, 겨울이 가고 봄이 왔습니다. 대한민국 역대 정부 가운데 가장 민주적이라 부를 수 있는 탈권위적인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어둡고 축축한 터널을 지나  따뜻한 봄 햇살이 가득 찼습니다. 지긋지긋한 지역주의 망령이 사라지고 민주사회가 오고, 통일의 기운이 넘쳐날 것으로 한껏 들떴습니다. 


리영희 (1929-2010) 사진출처: 한길사

바로 그때, 리영희 선생은 햇살로 온기가 퍼지는 서재에 바로 앉아, 마비된 오른 손으로 펜을 꼭 쥐었습니다. 엽서 한 장 쓰기도 힘겨웠고 손은 계속 떨렸으며 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온 힘을 주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써 내려갔습니다.  

打破(타파)…  地域(지역)…  合心(합심)…  民主(민주)…  統一 (통일)… 

화면을 다시 끌어올려 17년 전, 선생이 남긴 글을 읽어보세요. 아주 찬찬히.

같은 물이어도, 장강의 앞과 뒷물결이 다른 것처럼, 글이 조금 달리 보이지 않나요? 시공을 뛰어넘어 나와 타자인 저자를 잇고 맺어주는 친필(親筆)원고만의 매력입니다.리영희 친필원고 소개는 다음편에 계속합니다.   

서울 충무로 뉴스타파함께센터에 오시면, 리영희 선생의 친필원고와 유품을 볼 수 있습니다. 단체 관람을 원할 경우, 뉴스타파함께재단 사무국으로 연락하세요. 안내해드립니다.

관람 시간: 평일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212-13 뉴스타파함께센터 (충무로역 1번 출구 50미터)
문의: 뉴스타파함께재단 사무국 02-6956-3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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