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친필원고의 매력④ ‘사람을 그리다’, 연세대 최 교수에게

12월 5일은 우상과 권력에 맞섰던 언론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10주기입니다. 재단법인 뉴스타파함께센터(이사장 김중배, 이하 뉴스타파함께재단)는 유가족과 후배 언론인들의 기증을 받아 소장하고 있는 리영희 선생의 친필원고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친필원고는 나중에 인쇄한 책과 달리 퇴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저자가 가졌던 사유의 얼개와 고심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친필원고와 함께 출간한 책을 비교하면 색다른 지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편지는 누군가를 향합니다. 노트나 일기와 달리 특별한 타인을 이어줍니다. 답장을 기다리는 사나흘의 시간은 애틋합니다. 재빠른 이메일에선 얻을 수 없는 핍진함이 있습니다. 빛의 속도에서 사는 오늘, 손편지는 귀하고 각별합니다. 

리영희 선생의 글쓰기는 방금 깊은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을 쏟아붓듯 차갑고 냉정합니다. 중국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노신 魯迅)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백영서 리영희재단 이사장의 표현을 빌리면 ‘송곳으로 찌르고 거기에다 소금까지 뿌리는’ 문체입니다. 

그렇다면 리영희 선생이 쓴 편지에선 어떤 ‘문향 (聞香)’이 피어날까요? 친필원고 첫 번째 소개글, <스핑크스의 코> 서문을 기억하시나요? 애석하게도 쓰지 못했던 ‘인간적 문장’을 선생의 편지에선 확인할 수 있을까요? 34년 전, 1986년 4월 봄날 선생이 동료 교수에게 보낸 편지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1. 1986년 4월 16일, 한양대 

또다시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아야 하는가. 총칼로 짓밟고 권좌를 꿰찬 독재자 전두환은 요지부동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과 시민들을 좌경, 용공, 불순세력으로 몰아간다. 전두환은 서서히 정권 연장의 야욕을 드러낸다.(1년 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개헌논의를 전면 금지하는 ‘4·13 호헌조치’를 특별 발표한다. 두달 뒤 6월,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매캐한 최루가스가 자욱하게 퍼진다. 반전, 반핵, 전방입소 거부, 독재 타도 데모가 이어진다. 멀리서 구호가 들린다.(12일 후 4월 28일, 양키고홈, 전방입소 거부를 외치던 서울대생 2명이 분신해 숨진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대학 연구실 책상에 앉아 펜을 쥐었다. 연세대 최 교수에게 보낼 답장 편지를 쓰고 있다. 

나는 며칠 전 기대치 않았던 선물을 받았다. 겉봉투에 연세대 최 교수의 이름이 써 있었다.  뜯어보니 책 한권이 있었는데 최 교수가 펴낸 것이었다. ‘무슨 일로 책을 보냈지?’ 그저 매스컴 관련 책이려니 짐작하다가 책 제목을 보고 멈칫했다. <산다는 것의 명인(名人)들> 책의 목차를 보고는 더 놀랐다. 예술, 문학, 학계, 정계 등 사계 명사들의 인생과 삶, 저서 등을 비평하는 글을 엮어 냈는데, 그 속에 내 이름 석자도 있었다.   

“비평의 논리와 지성의 논리, 李泳禧(리영희), 金炳翼(김병익)” 328쪽   

최 교수가 책을 왜 보냈는지 이제서야 의문이 풀렸다.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부끄러웠다. 내 이름이 “책 속에 들어가게 된 사실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이란 제 분수에 맞는 자리에 있어야지, 다만 이름 석자뿐이라 하더라도 책 이름이 너무 무겁고 짓눌리는 감(感)이 올시다. ‘야 이건 너무했구나!’ 한참 신음을 하다가 펜을 들었습니다.” (1986년, 리영희 친필 편지) 

2. 1986년 3월, 연세대 

초판 출간을 앞두고 고민이다. 그동안 한 권의 책이 되도록 글을 써 모으면서 당초 생각해 둔 제목이 있었다. ‘사람을 그리다.’ 사람을 그림으로 그리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중의적인 뜻을 지닌 이 말이 살갑고 정감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난색을 표했다.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댔다. 결국 책 제목을 다르게 정했다. <산다는 것의 명인(名人)들> ‘사람을 그리다’라는 제목으로 하지 못한 아쉬움은 여전했다. 책의 서문인 머리말 제목이라도 붙여 넣기로 했다. 

“ ‘그리다’는 말에는 다 알다시피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려낸다, 묘사한다는 뜻이 있고 또 그리워한다, 동경한다는 뜻이 있다. ‘사람을 그리다’라고 할 때도 물론 그 두 가지 뜻에 걸쳐서 한 말이었다. 
나는 사람을 그리워했고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사람다운 사람을, 제 길을 걷는 사람을, 제 멋을 지닌 사람을, 나보다 나은 사람을, 아니 때로는 나와 같이 못나고 약한 사람을 나는 그리워했고, 지금도 그리고 있다.”  <1986년, 산다는 것의 명인(名人)들> 서문 

책에 들어갈 내가 ‘그리는’ 인물들을 한 명씩 정리했다. 그 중 리영희 교수의 이름이 보인다. 나와 직업 이력이 비슷하다. 한때 나와 같이 신문사 기자로 일했고 지금은 나와 같이 대학교수로 있다. 나와 생각의 결은 다르지만, “제 길을 걷는 사람다운 사람”이다. 오랜만에 그의 책을 다시 꺼내 펼친다. 

지금 읽어도 등골이 서늘하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자들이 불태운 금서였고 빨간 딱지를 붙힌 불온서적이다. 리영희 교수에게 이 책의 저술은 목숨을 건 실천 행위였다. 그는 심한 고초를 당했다.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징역형을 살았다. 광풍의 시대, 압제와 탄압은 지식인과 저널리스트의 숙명이지만 피하지 않고 감내했다.

이 책에서 많은 이들이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 (김동춘)을 받고 “냉전적 의식과 사고의 깊은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맛보았던” (조희연) 이들도 적지 않다. 책을 구성하는 내용도 충격이지만, 이 책을 펴낸 시기가 아찔하다. 

1974년 6월 5일…

3. 1974년 12월, 성균관대  

유신독재의 광풍은 온 사회를 휘감으며 거세게 몰아친다. 성탄절을 앞둔 12월 14일, 조지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가 미국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오글 목사는 인혁당 사건의 고문 조작을 폭로하며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에 헌신했다.(2020년 11월 23일, 오글 목사는 향년 91세로 미국에서 별세했다.) 두달 전 10월 24일,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었다. 독재정권이 놔둘리 만무했다. 사주와 야합해 백지 광고로 탄압했다.(이듬해 3월, 정권과 동아일보 사주는 젊은 언론인 110여 명을 강제로 쫓아냈다.)  

1974년 유신체제 3년,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다. 그해 4월, 긴급조치 4호가 잇따라 나왔다. 천 명이 넘는 대학생을 한꺼번에 영장없이 체포했다. 이 중 250여 명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유신체제의 전복을 시도했다며 인혁당 사건을 터뜨렸다.(이듬해 1975년 4월 8일, 도예종, 여정남, 이수병 등 8명이 사형을 선고 받고 그 다음 날 아침, 8명은 형장에서 차례대로 죽임을 당했다.) 

‘긴급조치’가 ‘일상조치’가 돼 버린 “긴조”시대다. 살기 위해선 납작 엎드리고 바짝 숨죽여야 한다. 누구나 언제든 죽임을 당할지 모를 압제의 시대, 박정희는 공포정치로 국민의 눈과 입이 꽁꽁 닫히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때 리영희는 거친 세상에 책을 내놨다.  

<전환시대의 논리> (1974년 6월 5일, 창작과비평사) 줄여서 “전논.”

“저널리스트로 있는 이상, 붓을 꺾고 글을 안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나처럼 글을 안 쓰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철학자가 있을 수 있어도 글을 안 쓰는 저널리스트는 이미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1974년 12월, 비평의 논리와 지성의 논리)

불을 보듯 뻔한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꺼이 제 몸을 던졌다. 거의 가망이 없는 상황에도 민주주의의 확고한 희망을 품었고 이를 무기 삼아 우상을 뚫고 이성의 과녁으로 돌진했다.   

“생각이야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할는지 모른다. 나는 혼자서 생각을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혼자서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글도 누구나 다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나만이 보기 위해서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글을 누구나 다 제때에 발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74년 12월, 비평의 논리와 지성의 논리)

“책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무엇’을  담아냈느냐는 내용 못지않게 ‘언제’ 쓰고 ‘언제’ 발표를 했느냐는 시점이 중요하다.” 저자는 글의 앞머리나 끄트머리에 글 쓴 날짜를 써놔야 한다. 오늘의 독자는 물론 내일의 독자를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미래의 독자들은 글이 쓰인 날의 표기를 주의깊게 읽어야 할 것이다. 저널리스트 리영희는 제때 쓰고, 제때 발표했다.  

그해 12월, 나는 그의 책을 비평하는 글을 쓰고 발표했다. “바깥세계를 바라보는 리영희의 ‘래디컬’한 논리”를 평하는 짧은 글이었다. 그가 쓴 책의 내용을 다 동의해서 쓴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논조에 따라가지 못하는 대목도 있고 그의 논의에 이의가 있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나는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말을 빌려 글을 마무리했다.      

“그대의 말에 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그 말을 할 권리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1974년 12월, 비평의 논리와 지성의 논리

4. 1986년 4월, 한양대

아차 싶다. 11년 전, 최 교수가 나의 첫 책 <전환시대의 논리>의 비평 글을 발표했을 줄이야. 지금에서야 알게 돼 미안하다. 마음의 빚을 지고 말았다. 뒤늦게나마 최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가 보낸 <산다는 것의 명인들>의 책장을 넘긴다. ‘사람을 그리다’는 서문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다’는 말에 절로 공감을 이룬다. 사람을 그리워하고 공경한다는 두 번째 뜻이 더욱 그러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어렸을 때 그림을 공부할까 해서 한 2년 동안 줄곧 인물소묘만 해보다가 그만 둔 일이 있다. 스스로 소질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림은 그만두었으나 그 뒤에도 사람을 그리고 싶은 욕심만은 그대로 간직해왔다. 여기 모은 글들은 그런 의미에서는 ‘화필’ 대신 나의 어설픈 ‘문필’로 습작해 본 소묘집이다. 말하자면 내가 그리는 사람들은 글씨로 그린 초상화집이다.” <산다는 것의 명인들>

잠시 읽기를 멈춘다.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사교 행위가 아니던가. “내 인생의 빈 자리를 채워주고 보태주던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십수년 전 나에게 일어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떠올린다. 지진 인두자국처럼 선연하게 내 몸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 세상에선 만날 수 없어 아팠던 두 사람과의 이별, 기어이 만남이 되었던 한 사람과의 인연이 한데 뒤섞인 경험이다. “나의 인생에 비어있는 그 무엇을 그이들에 의해 채워지기를 바라며 ‘그리던’ 이름”을 머릿속에서 차례로 끄집어 낸다. (대화 2005년)   

5. 1969년, 서울  

“나는 해방 당시와 그 이후 시기에, 한국문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일본어와 영어에 익숙해 한국소설을 굳이 찾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또한 한국 문학이 나의 국제정세 공부에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지적, 정서적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다. (대화, 2005년)

그러다가 한 시인을 알게 됐다. “너무나 순수한 그의 삶의 정서와 뜨거운 겨레 사랑에 반했다.” 백낙청에게 시인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놀랍게도 얼마전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 상심이 컸다. 훌륭한 시인을 생전에 사귀지 못한 것이 원통했다.(대화, 2005년)

 “그 훌륭한 문학작품을 분비물처럼 뱉어서 시로 엮어낸 그 뛰어난 정신을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내가 사귈 수 있었다라면 나의 삶이 얼마나 더 풍요로워졌을까?” (대화, 2005년)

얼마 뒤, 또 다른 시인을 접했다. 그의 시를 찾아 다 읽기 시작했다. 사귈 기회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해 유월, 날벼락 소식이 전해졌다. 시인은 새벽 귀갓길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맑은 정신의 소유자를 만나서 사귈 기회를 또 한번 잃어버렸다.”

 “여러 해 전에 어느 시詩를 처음으로 접하여 너무도 감동했던 나머지 그 시인을 찾아 만나 보려 했더니 그 전해에 별세했다고 알고 크게 낙심했어요. 그 후, 또 한 시인과 알게 될 것 같더니 존경하는 그이도 차 사고로 불의에 떠나 버리더군요. 그 후부터는 ‘그리는’ 이가 생기면 일면식 없는 분이라도 찾아가서 경의와 사랑을 표하기로 했지요”  – (리영희 1986년 편지) 

그 무렵, 부산이 고향인 소설가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의 소설을 더듬어 읽어나갔다. 이번에는 꼭 만나보고 싶었다. 때마침 출판사에서 원고료를 받았다. 여비삼아 부산으로 단박에 달려갔다. 60대 후반의 원로 소설가를 만나 큰절을 올렸다. “광복동의 제법 큰 식당에서 한잔 술과 함께 푸짐한 식사를 대접했다.” 그의 넉넉한 인품과 따뜻한 마음에 큰 감명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원고료를 값지게 썼다. (대화, 2005년)

6. 1986년, 한양대 

이제 최 교수에게 보낼 편지를 마무리 해야겠다. 책을 보내 준 고마움에 최 교수에게 시인이 누구인지, 나의 깊은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 넋두리로 비칠치라도 그는 웃어 넘길게다. 펜을 다시 든다.  

내가  “그리는” 이는 만나보기 전에 돌아 가신다는(젊은 나이에도 말이에요.) 가능성을 알게 된 뒤부터는 알게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찾아 가기를 한 겁니다. 그럼으로써 나의 인생에 그이의 인생이 보태지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나의 이야기올시다.
굳이 밝히자면, 처음 분은 신동엽 시인이고, 둘째 분은 김수영 시인이고, 셋째 분은 김정한 선생이외다. 딱딱한 공부를 하노라면 문예의 인물들이 그려집니다. 나의 인생에 비어있는 것을 그이들에 의해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을 선사받은 고마움에 넋두리를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웃어넘기십시오. 
1986년 4월 16일. 
연구실에서 리 弟(제) 영희 배 

7. 2020년 12월, 뉴스타파  

리영희 선생이 세로쓰기로 남긴 3장짜리 친필 편지를 다시 찬찬히 읽습니다. 조용히 내뱉는 선생의 따스한 숨결을 느낄만큼 옆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편지가 개인 간의 사사롭고 내밀한 대화이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언론인, 지식인으로서 냉정하고 차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이고 자유로웠던 영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1960년대 조선일보 외신부에서 함께 일했던 후배 기자 신홍범(전 조선투위 위원장, 1975년 강제해직)이 리영희 선생을 ‘뜨거운 얼음’이라고 규정했던 이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지에 등장하는 답장을 받는 당사자, 최 교수는 최정호 연세대 교수(현 울산대 석좌교수)를 말합니다. 최정호 교수는 리영희 선생이 보낸 편지 등 50여 명과 주고 받은 편지를 묶어 <편지>(2017년, 열화당)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그토록 만나서 사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운명적 두 사람, 신동엽, 김수영 시인의 작품 그리고 기필코 만났던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의 소설가 김정한의 삶을 웅변하는 짧은 문장을 여기에 새기며 글을 마칩니다.  

PS. 이상의 글은 리영희 선생의 친필 편지의 내용과 회고록 <대화>, 최 교수의 저서를 바탕삼고 당시 신문 보도와 시대상황을 참고해 풀어 쓴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과 최 교수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렵고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1967년)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김수영, 1968년)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와 타협한다거나 굴복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소설 산거족 (山居族) (김정한, 1971년)

리영희 친필원고의 매력③ 타인 같지 않은 인생 궤적… “노신을 좋아하는 까닭”

리영희 선생 친필원고 및 유품 상설전시 안내
시간: 평일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장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212-13 뉴스타파함께센터 (충무로역 1번 출구 50미터)
문의: 뉴스타파함께재단 사무국 02-6956-3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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