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책⑮ “책을 펴면 희망이 읽힙니다”…김성근 실장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서울 충무로 뉴스타파함께센터 1층, 북카페에는 뉴스타파 제작진이 기증한 수백 권의 책이 있습니다. 매주 한 권씩 도서를 기증한 기자를 만나 책 이야기를 듣는 시간 주간 <기자와 책> 열다섯 번째. 김성근 뉴스타파 경영기획실장이 소개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8년 증보판/돌베개)입니다.  

Q. 어떤 책인지 간단히 소개를 부탁합니다.   

고(故) 신영복 선생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968년 7월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88년 8월 가석방될 때까지 20년 간 감옥에서 가족에게 보낸 엽서를 모은 기록입니다. 

1988년 7월, <평화신문>의 연재물 ‘통혁당 사건의 무기수 신영복 씨 (옥중) 편지‘로 그 기록을 처음 세상에 알렸습니다. 4회 연재되고 1988년 9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라는 책으로 묶어 나왔습니다.

▲’기자와책’ 촬영을 위해 동네 책방에서 구해 왔다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초판. 북카페에 기부한 증보판이 아닌 초판의 느낌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Q. 이 책이 특별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통혁당 간첩단 사건? 20년 장기수? 

충격이었죠. 통념을 날려버렸습니다. 20년 감옥살이를 한 투사의 글이 아니었어요. 

따뜻했습니다. 정제된 언어, 쉬운 비유,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 사람에 대한 믿음, 함께 살아가기. 과장하지 않습니다. 냉철합니다. 명징함이 주는 청량감도 좋습니다. 책을 펴면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인 희망의 언어들이 곳곳에서 반짝입니다. 

책에는 삶의 의지로 단단해진, 단아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잡다한 이해관계에서 초탈해 넉넉한 도학자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노역을 자청하는 실천가의 모습이 있었고, 사람의 본질을 관계로 풀이하는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낮은 곳에서 함께 사는 사람의 인생을 배우고 그 삶을 역사로 이해하려는 혁명가가 여전히 거기에 있었습니다. 필독을 권합니다.

Q.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께 공유하고 싶은 구절을 소개해 주세요. 

아.. 너무 많은데요…

여름 징역살이 (계수님께, 1985.8.28)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관계의 최고 형태  (형수님께, 1984.11.29)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작은 실패 (형수님께, 1985.12.12)

주역 64괘 중의 맨 마지막 괘가 소위 ‘미제'(未濟)괘로서 괘사(卦辭)에는 “어린 여우가 물을 거의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이로운 바가 없다”(小狐汔濟 濡其尾无攸利)라 하였습니다.

지난 가을 교도소 앞 논으로 타작일 도우러 갔을 때의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추수 임시(臨時)에 쏟아진 폭우로 말미암아 물에 잠긴 볏단을 두렁에 옮겨 쌓으면서 우리는 흡사 비에 젖어버린 가을의 꼬리를 들고 섰는 듯 추연한 비감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세모가 되거나 또는 하루를 끝내는 저녁 무렵이 되거나 또는 작은 일 하나 마무리할 즈음에도 항상 어린 여우가 꼬리를 적시는 그 마지막 과정의 ‘작은 실패’에 생각이 미칩니다. 이러한 어린 여우의 연상은 어떤 일이나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더욱 신중한 태도를 갖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만 지금 생각으로는 그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이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작은 실패가 있는 쪽이 없는 쪽보다 길게 보아 나은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실패가 있음으로 해서 전체의 국면은 ‘완결’이 아니라 ‘미완’에 머물고 이 미완은 더 높은 단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되어줍니다. 더구나 작은 실패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과 사물을 돌이켜보게 해줍니다. 괘사에도 완결을 의미하는 ‘기제'(旣濟)는 “형통함이 적고 처음은 길하지만 마침내 어지러워진다”(亨小初吉終亂)고 하여 그것을 미제의 하위에 놓고 있습니다.

도대체 역(易)의 오의(奧義)를 숙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소위(所爲)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타락의 노르마 (계수님께 1984.5.7)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 판단의 주체가 또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눈이 달리게 마련이고 자신의 그릇만큼의 강물밖에 뜨지 못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제한성과 특수성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한 자기의 생각과 견해를 넓혀나가기는 몹시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징역의 이데올로기(?) 속에 격납(格納)되어 있는 이 가학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은 어떤 형태로든 청산되어야 할 징역의 응달입니다. 그러나 징역이 아니면 얻기 어려운 냉정한 시각과 그 적나라한 인간학으로 해서 기존의 도덕적 베일, 분식(粉飾)과 허위로부터 시원하게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은 징역의 모든 중압을 보상해주고도 남는 값진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자유로운 정신은 계란이 병아리를 약속하듯 새로운 것에로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징역에 고유한 ‘타락의 노르마’가 부끄러운 것이기보다 오히려 쾌적한 것으로 느껴지고, 우리들의 옆에서 행해지는 방약무인(傍若無人)의 언행이 노엽다기보다 가식 없는 실체를 보여주는 소중한 통찰로 생각됩니다.

밑바닥의 철학 (계수님께 1987. 3. 21.)

교도소는 지옥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천국일리도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도소가 ‘밑바닥’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회의 밑바닥, 어떤 시대, 어떤 역사, 어떤 인간의 밑바닥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낮고 어두운 밑바닥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기에 걸맞는 ‘철학’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비단 징역살이에 한한 문제만은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특히 징역살이에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밑바닥에 세우는 냉정한 시선과 용기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시선과 자신에 대한 용기만이 자기가 선 자리를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서 위치규정할 수 있게끔 대자적(對自的) 인식을 정립해주는 동시에 징역 세월 동안 무엇을 배우고 무엇에 물들지 말아야 하는가를 가릴 수 있게끔 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곧 막힌 벽으로부터 시선을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이고 밑바닥이 하늘”이라던 그 녹두의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 그 넉넉한 마음이야말로 사회와 시대와 역사와 인간의 진실을 향하는 한 줄기의 ‘양심’이며, 봄도 더디 넘는 옥담 속에서 겨우내 눈록빛 새싹을 키우는 매운 ‘예지’라 믿습니다.

서도의 관계론 (아버님께, 1977. 4.15)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獨存)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 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닫힌공간 열린정신(형수님께, 1984. 4.26)

긴장과 갈등으로 팽팽히 맞선 관계는 대자적(對者的) 인식의 한 조건일 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관계의 실상입니다. 관계를 맺고 난 후의 편안하게 길들여진 안거(安居)는 일견 ‘관계의 완성’ 또는 ‘완숙한 관계’와 같은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그것을 가져다준 관계 그 자체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음을, 이미 붕괴가 끝나가고 있음을 허다히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 교도소에 와서 느끼는 이 갈등과 긴장을 교도소 특유의 어떤 것, 또는 제 개인의 특별한 경험 내용에서 연유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물의 모든 관계 속에 항상 있어온 ‘관계 일반의 본질’이 우연한 계기를 만나 잠시 표출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긴장과 갈등을 그것 자체로서 독립된 대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도리어 이것을 통하여 관계 일반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시점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제 자신과 제 자신이 놓여 있는 존재 조건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귀중한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긴장과 갈등을 견딜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역량을 제 개인의 고독한 의지 속에서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하얀 벽과 벽에 의하여 또박또박 분할된 그 수많은 공간마다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서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호색과 문신 (형수님께, 1983. 11. 22)

사회의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서, 지구의 자전처럼 개인이 느낄 수 없는 엄청난 ‘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종이 호랑이’만도 못한 이 서투른 문신이 이들의 알몸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불행한 사람들의 가난한 그림입니다.

하루의 징역을 끝내고 곤히 잠들어 고르게 숨쉬는 가슴 위에 사천왕보다 험상궂은 얼굴로 눈떠 있는 짐승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한 마리의 짐승을 배워야 하는 그 혹독한 처지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되어 가득히 차오릅니다.

함께 맞는 비(1983. 3. 29)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몇 대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제가 토를 달아 덧붙여 설명하는 것보다 더욱 와닿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말씀하신 구절에도 잘 드러나지만 사람간의 관계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 대한 사유와 고민의 흔적이 많습니다. 오랫동안 뉴스타파 살림을 맡아 오시면서 비슷한 고민들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평소에 관계와 소통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선택지를 줄 수 있을까? 

차선은 무엇일까? 

선한 동기를 성과로 착각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Q. 마지막 한줄평 

신영복 선생님께는 죄짓는듯한 말씀이지만 우리사회가 이런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불행이지만 축복입니다.

Q. 추가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 분들이 이어서 보면 좋을 만한 책이 있을까요? 

故 신영복 선생의 책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1988. 9.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출간
  • <엽서>(1993), 
  • <나무야 나무야>(1996)
  • <더불어 숲 1, 2>(1998)
  • 1998. 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증보판 출간
  • <신영복의 엽서>(2003)
  •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4)
  • <처음처럼>(2007)
  • <청구회추억>(2008)
  •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2015)

그중 몇 개만 손꼽자면, 첫 번째는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입니다. 선생이 20년의 감옥살이, 7년의 칩거를 마치고 세상과 만난 것이 1995년 11월 중앙일보 연재를 통해서입니다. 첫 글이 노신을 인용한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인데요. 소설동의보감의 유의태와 허준의 밀양 얼음골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한 사제의 연쇄에서 찾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이 연재물을 엮은 책이 <나무야 나무야>(1996)입니다.

또 하나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붙은  <담론>(2015)입니다. 이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부분이 “석과불식(碩果不食)” 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이 있습니다. 선생은 ‘씨과일은 먹지 않는다.’로 풀이하시는데, 큰 과일은 씨를 받기 위해 오히려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농부는 굶어도 종자를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절망과 역경의 상황에서도 이 씨과실을 먹지 않고 땅에 심어 새봄의 싹으로 나게 하는 것. 그것이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몫이고,  “석과불식(碩果不食)”의 희망의 교훈입니다. 뉴스타파 사람들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 ‘기자와책’을 보실 여러분과, 뉴스타파 동료들에게도 한번쯤 공유하고 싶었다며 몇 번이나 되새겨 이야기했던 구절을 다시 한번 옮깁니다.  

김성근 뉴스타파 경영기획실장은 1999년부터 14년 동안 언론노조의 상근활동가로 일해왔으며 노보편집국장, 선전홍보실장, 정책실장, 사무처장 등을 두루 거쳤다. 2013년 뉴스타파에 합류해 경영, 회계, 회원사업 등 뉴스타파 살림을 총괄해오고 있다. 좌우명은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이다. 

기부: 김성근 구성: 조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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