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친필원고의 매력⑥ “인간 행태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고(故) 리영희 선생(1929 - 2010)은 실천적 지식인이자 비판적 언론인이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 동안 연행 9차례, 구금 5차례, 재판 3차례를 받았고 모두 1,012일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평생 불의에 침묵하거나 타협하는 나약한 지식인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지독한 상업주의에 기반해 거짓과 혐오,분열을 부추기며 성찰없는 보도행위로 뒤범벅이 된 대한민국 언론생태계의 자화상을 극복하기 위해, 리영희 선생이 품었던 지식인,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뉴스타파함께재단은 2020년에 이어 올해도 선생의 친필원고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리영희 선생의 저작은 독재시절 ‘금서’였습니다. 오늘 전해드릴 선생의 친필 원고도 ‘금서’에 관한 것입니다. 글의 제목은 “성을 통한 인간 행태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입니다. 독일의 예술사학자 에두아르트 푹스가 1909년 낸 <풍속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서평이자 책 추천서인 셈입니다. 원고지 맨 위에 “문화부 조현욱 기자 앞”이라고 써 있습니다. 신문사에 보내는 기명 칼럼입니다. 1993년 10월 5일 중앙일보 ‘책과 시대’ 코너에 실렸습니다. 

“에르번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는 그와 같은 새로운 사실에 눈이 뜨게 되는 해석과 설명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이 창조한 남(男)과 여(女)라는 두 성의 존재가 엮어내는, 그 방대한 책을 꽉 채운 그림은 황홀할 뿐이다. 남과 여의 모든 행태의 박물관이고 미술관이다.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중략) 그것은 희열에 찬 경험이다. 몇 십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 글은 이듬해인 1994년 출간한 선생의 평론집,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 1994년) 등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분량에서 신문사에 보낸 친필 원고와는 조금 차이는 있습니다. 평론집에 실린 “나의 독서 편력⑥ 성을 통한 인간 행태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란 제목의 분량이 신문 기고문보다 약 두배 가량 많습니다. 

친필 원고 첫 페이지에 “나의 독서편력⑥의 P7 上 895이하”라는 메모가 나오는데, 중앙일보에 실린 글의 경우, “나의 독서편력⑥”을 줄이고 고쳐 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1> (이미지 출처 : yes24)

<풍속의 역사>는 1909년 독일의 사회주의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가 내놓은 기념비적인 책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인간의 성행동이라는 독특한 관점으로 해석하며 정치나 경제 등 기존의 역사학계의 주류적 관점이 아닌 새로운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문명사를 ‘인간 성행동의 역사’로 저자는 설명합니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제일 먼저 전국의 도서관에서 끌어내어 태워버린 한 책의 제1호가 마르크스의 저서이고, 제2호가 “풍기문란한 음화집”이라고 매도한 푹스의 <풍속의 역사>였다. 정신병자 같은 히틀러에게는 이 책이 그렇게 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이 책도 한때 금서였습니다. 나치시대 히틀러가 집권하고 금서로 지정한 두 번째 책이 <풍속의 역사>입니다. 수많은 외설적이고 적나라한 삽화, 도판이 등장하고, 그 당시 전통적 성 윤리에 도전하는 권력자에 보기엔 매우 불온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책이야말로 20세기를 빛내는 ‘대표 저작물’임에 틀림 없습니다. 21세기 현재의 성인지 감수성과 성등평의 관점에서 보면,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남성 중심적인 서술의 잔상이 남아있습니다. 또 오해를 살만한 거북한 대목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하이힐의 탄생, 노처녀에 대한 의견 등입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가 폄훼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혜안과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다’고 푹스는 선언합니다. 

지금에서야 미시사, 문화사, 풍속사 등이  보편적이지만, 그 당대에는 이런 주제의 담론은 역사서술의 ‘시민권’을 얻지 못한 ‘불온한 야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스토리를 탁월한 식견과 광범위한 지식을 바탕으로 ‘정사’의 반열에  끌어올린 이가 푹스입니다. 푹스 이후 모든 풍속사는 ‘푹스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습니다. 마치 전세계 종교와 민속을 아우르는 루마니아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해박함을 보는 듯 합니다. 

특히 “여성 억압의 본질을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로 파악하고 있고, 여성해방은 사회의 경제적 기본구조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하는” 푹스의 기본 인식체계는 지금도 시효가 살아 있습니다. 

독재자가 금서로 정한 책이라는 것이 리영희 선생의 호기심을 끌었던 걸까요? <풍속이 역사>를 국내에 첫 소개한 사람 중에 선생도 포함돼 있습니다. 선생은 책을 소개하고 번역에도 참여합니다. 

“푹스를 우리나라에 맨 먼저 소개하고 「풍속의 역사」의 일부를 번역했음은 물론 우리의 번역과정에서도 많은 조언을 해준 리영희 교수” – <풍속의 역사> 역자 후기 중-

중앙일보에 게재된 기고글에는 삭제됐지만, 친필원고에는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을 두고 “과분한 명예”라고 표현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일찍이 한국사회에 이 책을 소개하게 된 배경은 다만 우연의 결과였다. 나에게는 과분한 명예이다.”

1986년 <풍속의 역사>를 번역 출판한 곳은 까치출판사입니다. 책을 번역을 한 이는 이기웅과 박종만. 각각 열화당 출판사와 까치출판사 대표입니다. 대한민국 출판계를 대표하는 거두입니다. 때론 책의 내용 못지 않게 그 책을 낸 곳이 어디인지, 출판사를 더 도드라져 보일 때가 있습니다. 열화당(이기웅), 까치글방(박종만), 한길사(김언호), 두레출판(신홍범)이 그러할 것입니다. 저술인의 능력 못지않게 출판인의 철학, 품격도 중요합니다.

리영희 선생에게 독서는 “자유인이고자 한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선생에게 독서는 곧 과학이었고 지적 자유인의 식량이었습니다. 

“사람은 독서를 통해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제약에도 스스로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기에게 필요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친필 원고 마지막엔 이런 메모가 있습니다. 이런 게 친필원고만의 매력이겠죠

“※ 李泳禧(한양대학교수)
(※이름을 반드시 漢字로 할 것)”

“이름을 반드시 한자로 할 것”, 기고자의 요구치곤 특이합니다. 실제 중앙일보는 선생이 원하는대로 이름을 ‘李泳禧’, 이렇게 한자로 게재합니다. 생전 선생은 ‘이영희’가 아닌 ‘리영희’로 불려지길 원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왜 선생은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은 ‘리영희’  불리길 원했을까요? 선생의 이름이 李泳禧를 거쳐 ‘리영희’가 된 변천사가 대략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고향 평안북도에서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아, 그의 성 이(李)는 ‘리’로 발음했다. 해방 직후엔 (중략) 리영희로 표기했지만, 이후 냉전의 극성을 부리던 시절 ‘북괴의 발음을 따르면 오해받을 수 있다’는 주변의 충고에 이영희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영희라고 표기할 경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한자 표기인 ‘李泳禧’를 쓰고자 했고 처음 그에게 글을 청탁하는 곳에는 반드시 한자로 이름을 표기해달라는 요청을 붙였다.” <진실에 복무하다>(창비, 2020년) 중-

“한글 전용 신문인 한겨레신문에서 한자로 이름을 표기할 순 없는 일이었다. 이때 그가 대안으로 다시 생각해낸 것이 ‘리영희’였다.”  <진실에 복무하다>(창비, 2020년) 중-

조선일보 해직기자 출신의 신홍범 기자는 선생의 ‘리영희’ 이름에 대한 고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리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어린 시절 고향인 평안도에서 불러온 발음은 ‘리영희’였기 때문에 ‘이영희’라고 부르면 자신의 이름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때 모든 글에 이름을 ‘리영희’로 쓴 일이 있는데, 어떤 친구가 “그렇게 북괴의 발음을 쓰면 오해받기 쉽다”고 충고하는 바람에 ‘이영희’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쓰는 것이 자신의 이름 같지 않았는지 이승만 대통령도 ‘리승만’이라고 썼는데 자신이라고 ‘리’자를 못 쓸 이유가 없다면서 ‘리영희’라고 쓴다고 하였다. 이런 내력을 알고 나는 이것 또한 분단 이데올로기가 가져다주는 불필요한 오해를 넘어서서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리 교수의 정신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굴 속의 독백>(나남출판, 1999년)  중 

친필원고 풀텍스트 보기 링크

글 : 장광연

리영희 친필원고의 매력⑤ 20년 전 글을 편하게 읽지 못하는 이유… 제4회 만해상 수상소감

서울 충무로 뉴스타파함께센터에 오시면 리영희 친필원고를 보실 수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 친필원고 및 유품 상설전시 안내
– 시간: 평일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 장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212-13 뉴스타파함께센터 (충무로역 1번 출구 50미터)
– 문의: 뉴스타파함께재단 사무국 (02-6956-3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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