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리영희 선생(1929 - 2010)은 실천적 지식인이자 비판적 언론인이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 동안 연행 9차례, 구금 5차례, 재판 3차례를 받았고 모두 1,012일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불의에 침묵하거나 타협하는 나약한 지식인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지독한 상업주의와 거짓과 혐오,분열을 부추기고 성찰없는 보도행위로 뒤범벅이 된 대한민국 언론생태계의 자화상을 반성하기 위해서라도 리영희 선생이 품었던 지식인, 언론인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올해도 뉴스타파함께재단은 선생의 친필원고를 연재합니다.

기자를 직업으로 삼으면서 버릇이 하나 둘 생겼는데, 그 하나가 만남을 약속한 이의 경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인터뷰이나 취재원과 만남을 갖고,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그가 걸어온  삶의 흐름, 궤적을 되짚어보는 것이지요. 

영화를 감상하기 전,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훓어 보고 저서를 읽기에 앞서 연구실적을 일람하는 것처럼요. 한 때는 책이나 작품을 미리 구해서 읽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면구스럽게 일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게을러졌습니다.  

오늘 소개할 리영희 선생의 친필 원고는 자필이력서입니다. 오래 전 초등학교 시절, 학생기록부 같은 빳빳하고 두터운 종이 위에 펜으로 빼곡하게 써 내려갔습니다. 45년의 삶이 종이 한 장에 담겨 있습니다. 

1950년 3월, 22살에 국립해양대학교 항해학과를 졸업하고, 경북 안동 공립고등학교 영어과 교사로 근무합니다. 그해 한국전쟁이 나자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고, 1957년 7월 합동통신에 입사해  첫 기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후 1971년 ‘64 지식인’ 선언으로 강제 해직된 이후, 1972년 2월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에 임용됩니다. 선생의 나이 44살이었습니다. 

이렇게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절을 거쳐 1995년 2월,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하고 1996년 2월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를 끝으로 이력이 마침표를 찍습니다. 45년 선생의 일생이 ‘자필 연보’로 기록돼 있습니다.


선생의 자필이력서 첫 장

중간 중간, 선생은 괄호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1차 해직, 1차 복직, 2차 해직, 2차 복직을 적었습니다. 교수직에서의 두번의 해직과 복직을 말합니다. 해직과 복직이 반복되는 동안 구금과 구속이 이어졌습니다. 민주주의가 사라졌던 독재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꺼이 몸을 던져 역사의 과녁으로 돌진했던 고단했던 삶이 배어 있습니다.

그 다음장에는 선생의 저서와 연구논문을 정리돼 있습니다. 먼저 저서인데, 1974년 첫 저서인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1984년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까지 6편의 책을 소개합니다. 

그 밑으로 연구논문을 적었습니다. 1970년 8월 <미군 감축과 한미안보 관계고>라는 논문이 시작인데,  언론 칼럼이나 기사가 아닌 본격적인 논문 쓰기의 시작이었습니다. 1983년 8월 기독교사상에 실린 <한반도 주변정세의 질적변화>까지14편의 연구 논문을 정리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 일본과 소련의 반체제 인사까지 연구의 주제는 다양합니다.


선생의 자필이력서 둘째 장

선생의 저서 목록
선생의 논문 목록

아무런 수식이나 미사여구가 없는 건조한 연보도 큰 울림을 줍니다.  묵직한 평전이나 저서도 좋지만, 이력서 한 두장으로도 그 사람의 생애를 충분히 보여줍니다. 세월의 무게로 누렇게 바래고, 또렷했던 잉크색도 사위어졌지만 그럴수록 자필이력서의 공명(共鳴)은 더욱 커집니다. 

작은 바람에도 흩어지고 날리는 벚꽃 한송이의 무게도 버거운 ‘삶들’이 우리 옆에  가득합니다. 시공의 중력을 감내한 선생의 이력서를 읽으며 희망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리영희 친필원고의 매력⑥ “인간 행태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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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충무로 뉴스타파함께센터에 오시면 리영희 친필원고를 보실 수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 친필원고 및 유품 상설전시 안내
– 시간: 평일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 장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212-13 뉴스타파함께센터 (충무로역 1번 출구 50미터)
– 문의: 뉴스타파함께재단 사무국 (02-6956-3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