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족벌’ 플러스] 박종만 최후진술 “이 땅에 언론은 없습니다”

1979년 7월 25일. 며칠간 선선하다가 찌는 듯한 무더위가 찾아왔다. 전날부터 낮 기온이 30도를 웃돌기 시작했다. 비도 살짝 내려 습도까지 높았다. 

윤수경은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깊은 호주머니가 달린 긴 옷차림으로 서울 정동에 있는 법원 청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소형 녹음기의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일하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이경배가 건네준 녹음기였다. 

그녀는 법원 정문을 지나 서울고등법원 213호 법정으로 향했다. 이미 꽉찬 법정은 숨죽여 말하는 사람들의 긴장으로 터질듯 팽팽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을까 더 가슴이 졸였다. 윤수경은 최대한 태연한 척 방청석 맨 앞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한숨을 돌리고서야 피고인석에 포승줄로 꽁꽁 묶인 죄수복 차림의 피고인 6명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중에는 남편 박종만의 낯익은 모습도 있었다. 그녀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녹음기 테이프는 이미 돌고 있었다. 미리 연습한 대로 법정에 들어가기 전 녹음 버튼을 눌러뒀다. 

이날 그녀가 몰래 녹음한 유신법정 최후 진술 육성은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했으나 박정희 독재의 폭압을 폭로하는 동시에,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당당하게 맞섰던 젊은 언론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물로 역사에 남았다.

아래는 이른바 ‘민권일지사건’과 관련해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기소된 동아자유언론수호실천위원회 위원 7명의 최후 진술 가운데 박종만 전 동아일보 기자의 진술 전문이다.


재판장: 다음 박종만 피고인

박종만: 예. 변호인들께서 이것으로 앞서 여러 분이 여러 가지… 사실 제가 할 얘기를 하는 데 앞서서,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마는 몇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던 1974년 그해 겨울이라고 기억합니다만, 그해 겨울에 동아일보 편집국 안에서 있었던, 기협 동아일보분회 총회에서 당시 기협 분회장이라고 해서 지금 이 자리에 같이 나와 있는 장윤환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고해성사를 하는 자세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전개해 나가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말이 상당히 감동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이 말 한마디야말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과, 그리고 그 이후에 전개된 자유언론실천운동, 그리고 1975년도 3월 이후 지금까지 만 4년여 동안 계속되고 있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그리고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활동의 모든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5.16 쿠데타 이후 지금까지 만 18년 동안 이 땅의 언론은 너무나도 많은 탄압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해를 거듭할수록 언론은 타락해왔고 언론 자유는 날이 갈수록 말살돼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인들은 권력의 온갖 탄압과 강경한 술책으로 해서, 권력 동원형 부패 기자로 타락하기도 하고, 혹은 실의와 좌절의 늪에 빠져서 허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우리 언론은 국민들로부터 심한 불신을 받게 됐고 언론인들은 지탄의 대상이 됐습니다. 특히 1972년도 이 나라가 소위 유신체제로 돌입하고 1974년도 이후 연속적인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이 땅의 언론은 완전히 암흑기에 들어가게 됐고 언론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채,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역기능만 하는 그런 언론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그런 기회를 가졌습니다. 도대체 이 땅에 언론이 있는 겁니까. 언론이 있다면 뭐 때문에 있는 건지, 이런 지경이 되도록 이 언론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우리가 언론인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비참하고 부끄러운 심정에서 하는 수 없이,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없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의 언론으로서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하나의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이 땅의 언론이 모두 죽어버리고 없는 것 같은 그런 삭막함 속에서 살려 나온 것이고 그런 암흑기 와중에서 시작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앞장섰던 우리들, 우리들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고결했던 언론인들이라든가, 또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던 그런 언론인들이라고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부패했고 그리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었으며 무기력하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던 그런 아주 평범한 언론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자유언론의 실천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 직장까지도 다 내버리고 투쟁을 했고, 그걸로 해서 우리가 젊음을 바쳐 일해 왔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만 4년여 동안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그러고도 지금까지도 자유언론을 위해서 우리가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기적이 결코 문자 그대로의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기적은 바로 우리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입니다마는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1974년도 10월 24일 이후, 우리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통해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비로소 그 의미를 조금 터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지난 4년여 동안 정말 너무나도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어왔습니다. 

실업자로서 겪는 그런 물질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검은 그림자, 이 감시의 눈초리라고 하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우리는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심한 고통과 시련을 우리가 이겨내고 지금까지 우리가 견뎌올 수 있었던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유언론실천을 통해서 이 민족과 이 민중 앞에 참회를 했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이 민족사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런 확신, 바로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지금까지 결코 뒤로 물러설 수 없었던 것, 우리를 결코 뒤로 물러서지 못하게 했던 힘.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통해서 그 과정을 통해서 이 민족과 이 민중에게 거듭거듭 했던 약속 “우리는 결코 이 민족과 이 민중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고 거듭거듭 했던 그 약속을 결코 저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지난 4년여 동안에 우리가 그렇게 크게 뭘 했다고 하는 그러한 성취감이나 자만감 같은 것은 가져본 일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부끄럽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지금 감옥에 들어와 있는 이 순간에도 여전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 1974년이나 75년도에 있었던 일회적인 참회, 그것만으로써 이루어진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 끊임없는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너무나도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때 과연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언론인으로서 무엇을 했던가, 그런 뉘우침을… 

그리고 과연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언론인으로서 할 일이 그렇게도 없었던 거냐, 그렇게 반성을 해봅니다. 

사실 이번에 문제가 된 이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일지’ 이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이런 부끄러운 심정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언론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그런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몸부림마저 지금 이 땅의 현실은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꽁꽁 묶어서 이 법정에 세우고 탄압을 하고 이것이 바로 이 땅의 실로 비참한 현실입니다. 

지난번 1심 재판에서 여기 있는 정연주 씨가 코미디라는 얘기를 했습니다만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이 사회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코미디라고 하는 말, 그것은 오히려 좀 부드러운 표현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사건과 관련해서 경찰에 연행된 것이 작년 10월 26일입니다. 그리고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기간은 우리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약 보름 동안입니다. 그런데 실상 경찰에서 경찰관에게 직접 심문을 받은 기간은 일주일 동안, 그것도 불과 몇 시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경찰서 형사 대기실이라든지, 숙직실에서 우리가 빈둥빈둥 놀았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구속되지 않고 형사 대기실 같은 데서 빈둥빈둥 놀았냐. 그것은 내가 알기로는 우리를 구속하느냐 구속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지 않아서였다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린 죄는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지금 이렇게 요시찰 마크를 달고 구치소  안에서도 아주 중범으로 엄중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를 저해한 그런 중대 사범들, 그런 중대 사범들을 구속하는 데, 구속 결정을 내리는 데 보름씩이나 걸렸습니다. 

나는 이 정부가 그렇게 비능률적인 정부라고까지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자칭 능률 생산을 한다고 하는 이 정부가 어떻게 그렇게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를 저해한 중대 사범들을 구속 결정하는 데 보름씩이나 걸리냐 이 말입니다. 내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경찰에 있는 동안 경찰 간부라고 하는 분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우리들을 설득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부인들을 동석시킨 자리에서 “지금 젊은 기분에 그렇게 떠드는데 처자식도 생각해 봐라. 잘 생각해봐라” 그렇게 설득했습니다. 

언제부터 이 정부가 그렇게 관대한 정부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를 저해한 그런 중대 사범들을…뭘 어떻게 잘 생각해 보라는 겁니까? 처자식을 뭘 어떻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이게 코미디가 아닙니까? 

뿐만 아닙니다. 내가 경찰에 연행된 뒤 지금까지 사실 경찰관들이나 이 교도관들,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다, 나를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나를 ‘당신이 무슨 죄인이냐 당신은 죄인이 아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입으로 소리를 내서 그렇게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들의 눈은 분명히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1975년도 5월 13일 이후 앞으로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긴급조치 9호가 유효한 이 기간 동안, 이것을 괄호 안에 묶어버렸어요. 

우리의 행동이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어떻게 해서 죄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언론인이 언론의 탄압을 개탄하면서 자유언론의 실천을 촉구한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도대체 죄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죄가 있다면 독재자의 칙령 한마디, 그걸 어겼다고 해서 이렇게 법정에 우리가 서서, 그리고 탄압을 받는다고 하면 이 사회를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얘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 이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고 이건 미쳐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이 사회는 커다란 코미디입니다. 이 땅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코미디, 그런 것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한 가지 꼭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재판장: 간단히 좀 요약해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종만: 예. 할 얘기는 다 하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그 자체 문젭니다. 유신헌법이나 긴급조치가 부당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철폐돼야 한다는 것은 1심에서도 거듭거듭 얘기했고 또 앞서 김종철 씨라든지 여러분이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정부 측 취지 설명에 대해서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정부 측에서는 이 유신헌법을 만들게 된 취지를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을 만들기 위해서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유신헌법의 제1 특징이 ‘통일 지향적’이다 라고 어떤 해설서에 보니까 적혀 있었습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인정을 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없는 그런 문제가 생깁니다. 이 얘기는 다시 얘기하면 유신헌법 이전의 헌법은 통일 지향의 헌법이 아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제1공화국 헌법, 그리고 제2공화국의 헌법은 물론이요, 소위 제3공화국의 헌법까지도 통일을 지향하지 않은 헌법이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제1공화국 헌법이나 제2공화국의 헌법은 또 그렇다 쳐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3공화국의 헌법, 그건 도대체 누가 만든 겁니까? 

5.16 쿠데타 이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그렇게 강력한 권한을 가졌던 군사정권, 거기서 만들어놓은 헌법 아닙니까? 그런데 그 헌법이 통일을 지향하지 않은 헌법이었다고 하니 도대체 이건 어불성설입니다. 

아니, 그걸 인정한다면 무슨 얘기가 되는고 하니 5.16 쿠데타를 일으켰던 바로 그 사람들은 민족의 장래라든지 통일이라는 것은 아예 염두도 없고 정권을 빼앗으려는 목적으로써 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5.16 쿠데타를 일으켰던 그 사람들이 그렇게 야심으로만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제3공화국의 헌법도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이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유신체제로 개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부 측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앞뒤가 안 맞고 뒤죽박죽이고 모순투성이입니다. 논리가 없습니다. 

나는 논리라고 하는 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논리라고 하는 건 다만 건전한 상식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상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말이 의미하고 있듯이 다수의, 공통의 의견, 공통의 견해. 그렇다면 논리가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건전한 상식이 결여돼 있다는 이야기이고 건전한 상식이 결여돼 있다고 하는 얘기는 다수의, 공통의 의견이 없다는, 다시 말해서 비민주적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이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여러 가지가 비논리적이고 모순투성이냐. 그것은 거짓을 참인 양 자꾸 꾸미다 보니까 끊임없이 비민주적인 것을 민주적인 것인 양 자꾸 꾸미다 보니까 이렇게 비논리적이고 모순투성이가 돼 버렸다. 그렇게 나는 생각합니다. 또 이 정부에서는…

재판장: 결론만 좀 얘기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박종만: 예. 좀 할 얘기는 다 해야 되겠습니다.

재판장: 아니, 다음 사람도…

박종만: 예, 알겠습니다. 또 이 정부에서는 유신헌법이야말로 세계 정치 사상 유례가 없는 그런 아주 독특한 헌법이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의 표현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 독특성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꼭 어떤 체제의 독특성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그 체제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정신병자의 경우를 예를 들어서 볼 때 정신병자들은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매우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유니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나 그들의 사고에서는 논리나 건전한 상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자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논리나 건전한 상식이 결여돼 있는 그러한 독특한 행위, 그러한 사고는 바로 정신병자가 정신병자가 되게 하는 이유입니다. 뭐 비슷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 얘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는 그들의 정부가 독일 국민을 위해서 가장 이상적인 정부 형태이고 가장 독특한 것이라고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의 정부 형태가 이상적인 정부가 아니었음은 그 이후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고, 그러나 독특성만은 우리가 인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치즘에는 논리나 건전한 상식이 결여돼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 정권은 끝내 그들의 국민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그런데 이미 지금 우리나라는 파탄의 증상이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파탄의 증상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겁니다. 그저 모두가 지금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이 지독한 불신 풍조,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못 물어뜯어서 애쓰는 이 만인 대 만인의 적대관, 또 그리고 한탕 잘 해서 일확천금이나 하겠다고 하는 이 몰염치한 사회 풍조, 그리고 또 창의성이라든지 자발성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완전히 묵살된 채 오직 어떤 권위에 향한 끝없는 굴종만을 강요하고 있는 이 정신 풍토, 이런 것들은 우리나라에 나타나고 있는 파탄의 증상입니다. 

이런 파탄의 증상들을 하루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정말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정말 참회의 광장으로 나서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집권자하고 정치하는 사람들도, 교수도 법조인도 언론인도 모두 참회를 해야 됩니다. 

물론 누구보다도 먼저 참회를 해야 되는 당사자는 소위 이 땅의 집권자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8여 년, 그리고 그 이후에 얼마 동안, 기나긴 세월 동안 이 땅의 국민들은 너무나도 배신을 많이 당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중의 소리가 외면돼 왔고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의 염원이 묵살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이 땅의 집권자들, 정말 이 민족 이 민중 앞에 겸허한 자세로 참회를 해도 좋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는 이 땅의 언론인들에 대해서 현역에 있는 동료 언론인들에 대해서 한마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제 이 땅에는 언론이 없습니다. 우리가 1심에서도 누누이 얘기를 했습니다만 이 땅에 언론은 없습니다. 이 땅에는 언론이 없고 다만 관제언론이 있습니다. 

아니, 이 땅의 언론이라고 하는 것은 언론이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되고 체제의 일부분이 돼버렸습니다. 

이제는 이 땅의 언론들은 소극적으로 그저 진실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의 죄악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그러한 적극적인 죄악까지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땅의 언론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이 땅의 언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나왔던 날, 그때도 정말 모든 언론이 다 죽어 없어진 것 같은 그런 삭막함 속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터져 나왔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 우리가 함께 들어 올렸던 자유언론실천의 횃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고 지금도 언론계의 어느 구석에서인가 하나의 불씨가 되어서 내연하고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불씨가 다시 되살아나서 자유언론의 횃불이 활활 타오를 때가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다음으로 대단히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이 사법부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작년에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이번에 출감한 송기숙 교수가 최후진술에서 그런 얘기를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제하에 법관들의 비교적 정확했던 양형 감각에 대해서 얘기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도 구속된 이후에 몇 가지 지표를 보면서 송 교수와 똑같은, 

(끊김) 1년 내지 그 이하의 가벼운 형을 받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 학교당국이라든지 행정당국에서는 아주 가혹한 처벌을 했습니다만 적어도 사법부에서만큼은 그래도 가벼운 처벌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유신체제로 돌입한 이후 지금까지 많은 학생들을 재판하는 그런 것을 볼 때 도대체 이 땅의 법관들은 어떤 분들인가? 어떤 분들이기에 식민지하의 법관들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학생들에게만은 가벼운 형벌을 했었는데 어떤 분들이기에 같은 동족의 학생, 그들에게 2년이다, 3년이다, 5년이다, 이렇게 중형을 때릴 수가 있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제 법관들도 이 사법부도 정말로 참회를 해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릇된 정치 재판을 하는 법관들은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자기가 그 재판이 잘못된 것을 알고,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할 수 없이 그 재판을 하는 그런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어떤 소신, 자기 소신에 따라서 그렇게 재판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1심 재판에서 간혹 후자와 같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1심 재판의 재판장께서는 자기 확신에 차서 우리를 2년 6월이다, 1년이다, 이렇게 형을 때리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그 1심 재판을 거치면서 중세 마녀들의 종교재판을 연상했습니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마는 그 연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세 마녀들의 종교재판을 하던 그 재판관들, 그들은 물론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무슨 다른 일도 있었겠습니다만, 그 재판관들은 대부분이 자기 신앙 양심에 따라서 그 재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기들의 소신에 따라서 재판을 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이단심문소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재판해서 화형에 처할까요? 그들은 어떤 소신에 따라서 신앙 양심에 따라서 재판을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어떻습니까? 

그 일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증명이 됐습니까? 그들이 신앙 양심에 따라서 그 소신에 따라서 재판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재판은, 그들의 판결은 부당했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게 아닙니까?

나는 이제 우리를 재판하고 계시는 법관님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역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용기와 결단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종교 재판을 하던 그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앙 양심에 따라서 재판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의 역사가 그것은 부당했다고 보는 것으로 밝혔듯이 우리가 어떤 형을 받든 앞으로의 역사는 우리에게 유죄판결한 그 판결이 부당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죄판결한 그 사람들이, 그 체제가 유죄라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입증해줄 것입니다. 거듭 나는 재판관님들의 용기와 결단을 촉구합니다.


박종만 전 동아일보 기자는 보름 뒤인 1979년 8월 8일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및 자격정지 각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가 10.26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뒤인 1979년 11월 21일에야 구속집행정지 결정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취재 김용진
녹취정리 조연우
디자인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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