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여름으로 계절의 옷을 갈아입던 5월 25일 토요일 늦은 오후였다. 대한극장 앞이 술렁인다. ‘동을 뜨기’(시위를 시작하는 행위)로 한 정보가 새나간 듯 하다. 전투경찰과 백골단(사복 체포조)이 쫙 깔렸다. 점차 살벌해진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이면서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순간, 퉁하고 튕겨 나가듯 1만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일제히 도로에 뛰어들었다. 노태우 정권의 퇴진과 공안 통치의 종식을 외치기 시작했다. 우루 꽝꽝꽝. 우박 떨어지듯 최루탄이 떨어진다. 허연 가스를 내뿜으며 지랄맞게 춤춘다. 곧이어 방독면을 쓰고 청자켓을 입은 수백 명의 백골단이 용수철 튀기듯 뛰쳐 나간다.
▲ 백골단(사복체포조) 자료화면
백골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경찰은 퇴계로와 충무로 대로를 완전 차단하고 학생들이 자진 해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1만 명의 학생들을 죄다 닭장차(경찰버스)에 태워 유치장에 가둬놓을 태세다. ‘토끼몰이식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학생들은 인근 진양상가와 인현상가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로 쫓겨 달아났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선두 그룹의 학생들에게 몽둥이와 발길질이 무차별 날라왔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손수건, 깨진 안경, 가방, 운동화 등 주인 잃은 소지품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학생들의 머리 위로 사과탄(휴대용 최루탄)이 연신 터졌다. 몇몇 학생은 최루 가루를 허옇게 뒤집어 쓴 채 고꾸라져 쓰려진다. 경찰은 이날 충무로에 940여 개의 최루탄을 발사했다. 딱 10분간. 그야말로 십자 포화였다.
▲故 김귀정 (1966~1991) / 사진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한극장 맞은편 도로, 한 학생이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인근 백병원으로 급하게 옮겼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불귀의 객이 됐다. 나이 25살,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은 그렇게 국가 폭력에 희생됐다. 경찰은 폭력을 극구 부인했지만 법원은 과잉 폭력 진압이 사인이었음을 넉넉히 인정했다.
그해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에서부터 5월 25일 김귀정까지. 숱한 젊은이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스스로 죽음을 맞았다. 김귀정이 죽임을 당한 다음날, 노태우 정권은 유신 공안검사 출신의 김기춘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며 시민사회를 더욱 탄압했다. 전두환을 이어받은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을 여지 없이 보여줬던 1991년 늦봄이었다.
충무로 뉴스타파함께센터 맞은편 도로에는 30년 전 ‘아비규환’의 그날을 기억하라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 신경쓰지 않으면, 무심코 밟고 지나갈 아주 작은 표지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귀정 사망현장, 성균관대학생 김귀정이 민주화 시위 중 경찰 과잉진압으로 숨진 자리”
▲서울 충무로 뉴스타파함께센터 맞은 편에 있는 고 ‘김귀정 표지석’
2021년 올해는 김귀정 열사 30주기다. 30주기를 맞아 그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어머니를 다룬 영화다. 영화 <왕십리 김종분>이다. 김종분은 고 김귀정의 어머니다. 올해 84살을 맞는다. 지난달부터 김진열 감독이 뉴스타파함께센터 협업공간 1번 편집실에서 마무리 편집 작업 중이다.
김진열 감독은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중견 감독이다. <그녀를 마주하다> (2012), <진옥 언니, 학교가다> (2007), <잊혀진 여전사> (2005) 등 여성의 삶과 이야기를 다룬 다큐를 주로 제작했다.
뉴스타파함께재단이 4월 9일, 김진열 감독을 만났다.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제작 이야기와 함께 독립감독과의 연대와 협업에 대한 의견도 들었다.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김진열 감독
아래는 감독과의 일문일답이다.
Q. 영화 제목이 ‘왕십리 김종분’인데, 김종분이 누구인가요?

고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예요. 그동안 우리사회는 김종분을,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로만 불렀던 것 같아요. 이제 열사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보다는 한국 사회를 열심히 살아온 ‘김종분’이라고 하는 사람을 되돌아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국가 폭력 희생자의 어머니가 아니라 김종분 자신 본연의 경험과 기억을 깨워나가는 작업이죠.
Q. 이 영화는 김귀정 열사 30주기를 맞아 만들어진 영화인데, 김귀정 열사가 주인공이 아닌 것은 의외다.
맞아요. 영화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김귀정 열사가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도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김종분을 들여다 보면,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김귀정은 ‘어떻게 성장을 했겠구나’, ‘이런 사람이었겠구나’, ‘그때 생각을 이렇게 했겠구나’라고 관객들이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열사 김귀정’이 아니라, ‘김종분의 딸, 김귀정’으로 그를 바라본다면 이 사람이 왜 학생운동을 했는지, 김귀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김귀정을 이해한다면 민주화운동을 하다 사망한 열사 김귀정이 아니라 그냥 도시 빈민의 딸로서 김귀정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Q. 영화 촬영 중 어떤 것이 가장 어려웠나요?
김귀정 열사가 사망을 했을 때, 언론에서는 ‘노점상의 딸’이라는 수식어를 그에게 붙였어요. 아마 그게 사람들의 시선을 더 집중시킬 수 있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보면 낙인이거든요. 가족들에게는 상처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부분에 있어서 작업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어디까지 관객에게 보여줘야 하나’라는 고민인거죠. 연출자 입장에서는 최대한 가까이서 많은 것을 찍고 싶지만, 또 그럴 수 없는 부분이 있는 작업인거죠. 어머니의 삶을 찍으려면 가족들도 함께 촬영해야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결국엔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부분은 보여주지 말자고 결정했어요. 그래도 마지막 촬영 때는 어머니의 집, 생활하는 공간까지는 담을 수 있었어요.
Q. 영화 촬영 중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세계화를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맥도날드에서는 외상을 할 수는 없지 않나요?” 이 문구가 기억 속에 계속 남았어요. ‘소비자와 생산자가 이런 식으로 단절되는 세상이 오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죠.
어머니(김종분)의 노점(편집자 : 김종분은 30년 넘게 왕십리에서 노점을 하고 있다.)을 보면 이 생각이 다시 들어요. 어머니 노점에서 돈을 빌려가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촬영 중에도 ‘교통비가 없다’면서 1만 원씩 빌려가는 단골들이 있더라구요. 사실은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서 어떤 게 필요할 때 우리 사회에 도움을 요청을 해야 되는데, 그 요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분들에겐 노점을 하는 어머니(김종분)인거죠. 지금 이 시대에 ‘외상’은 그렇게 이뤄지더군요.
제가 촬영나갔을 때도, 한 아저씨가 거의 10만 원치를 사면서 외상을 하시더라고요. (웃음)
Q. 영화는 언제쯤 볼 수 있나요?
일단 촬영은 끝났고요. 지금 편집 중에 있습니다. 아마 5월 25일 김귀정 열사 추모일에 맞춰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성균관대 동문들과 시사회를 가질거고요. 일반 관객들에게 9월쯤 개봉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편집자 : 김귀정 열사는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88학번으로, 매해 성균관대 동문들은 김귀정 열사 추모식을 열고 있다.)
Q. 이제 이야기를 돌려볼게요. 뉴스타파함께센터의 협업공간은 어떻게 알게 됐나요?
원래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중부여성발전센터에 사무실이 있어요. 거의 무료거든요. 그런데 저녁 9시면 문을 닫아요. 이게 문제였죠. 편집은 쭉 이어서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집과 사무실을 오가며 할까하다가, 선배 감독이 뉴스타파함께센터를 소개해줬죠. 그런데 와보니까 김귀정 열사가 사망한 대한극장 근처인 것을 알고 놀랐어요.
Q. 뉴스타파함께재단의 주요 미션 중 하나가 독립감독과 연대와 협업인데요, 독립감독으로서 어떤 것이 필요한가요?
결국의 제작지원이죠. 지원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독립감독들에게 제작지원은 ‘내 작업에 대한 지지’라는 의미가 있어요. 독립감독들의 작업은 상업적인 목적보단 사회적인 의미를 찾기위해서 하는거니까요. 그래서 제작 지원금이 많지 않더라도 지원을 받게 되면 되게 큰 힘이 돼요.
독립감독들이 사실 ‘내가 하는 이 작품이 사회적으로 별 의미가 없나?’라는 생각이 들 때 가장 힘들어요. 저도 예전에도 이렇게 작업하다가 이런 이유로 작업이 엎어진 적이 있거든요. 제작 지원이 없으면 이 기획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나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독립감독이 작업을 끝까지 해낼 수 있게 하는 게 제작지원이에요.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내 작업이 사회에서 의미를 갖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중요해요. 그래서 더 많은 독립감독과 연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제작지원 확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Q. 뉴스타파함께센터 협업공간을 실제로 이용해보니 어떤가요?
편하게 쓰고 있어요. 24시간 편하게 작업하고 있어요.
그리고 뉴스타파함께센터 협업공간에 들어가면 리영희 선생님의 얼굴이 먼저 보이거든요? 사실 저도 리영희 선생님과 인연이 있거든요. 20대 때 민언련 언론학교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의를 들었어요. 그때 민언련에는 작은 동아리방 같은 공간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서 언론학교 동기들끼리 모여서 ‘작당모의’를 많이 했어요. 리영희 선생님이랑 같이 등산도 했구요. 그러면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그곳에서 많이 나왔던거 같아요.
▲뉴스타파함께센터 협업공간 입구에 있는 리영희 유품 전시관
독립감독들이 사실 네트워킹이 약한 편이예요. 뉴스타파함께센터에 예전 민언련의 그런 작은 동아리방 같은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디어라는 건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정보를 공유하다가 나오는 거거든요. 제 사무실이 위치한 중부여성발전센터가 그래요. 디자이너도 있고, 영화감독도 있고, 포장지 제작하는 사람도 있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보면 또 새로운 사업이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뉴스타파함께센터도 그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끝>
정리 : 장광연
뉴스타파함께센터는 뉴스타파 후원회원 3만 5천 명과 건립 특별회원 3천 명의 독립 언론(인)들의 구심점이 될 공간이 필요하다는 염원이 모여 만든 공간이다. 이 공간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다. (문의 :재단 사무국 02-6956-3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