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①초토화폭격..트라우마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대표와 북한군·중국군 대표는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같은 날 밤 10시에 발효됐다. 미군은 이날 협정 발효 직전까지도 전투기를 출격하고 북측을 폭격했다. 한국전쟁은 공중폭격의 시간이었다. 전쟁이 지속된 3년 1개월간 심각한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뜰 수 없던 며칠을 제외하고, 공중폭격이 멈춘 날은 거의 없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군사 목표만 타격하는 전술폭격의 정확성과 위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미 공군은 ‘썬더 프롬 더 스카이(Thunder from the Sky)’라는 제목의 선전영상을 제작·배포했다. 이 영상에는 ‘전술폭격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렸다. 전술폭격의 핵심은 지상군 작전을 지원해 적진을 폭격하는 근접지원과 적의 물자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다리, 철로, 도로, 항만, 통신 시설 등을 폭격하는 차단작전이다. 미군이 정교하게 편집해 배포한 영상은 이러한 미 공군의 활약상을 홍보했다.

뉴스타파 제작진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행태가 이 선전영상이 주입하는 내용, 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 등에서 한국전쟁기 미군이 촬영한 다양한 영상 자료를 수집해 분석해 봤다. 그 결과 이 선전영상이 보여주는 내용은 반쪽짜리 그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뉴스타파가 수집한 영상 중 다수는 ‘썬더 프롬 더 스카이’ 같은 선전물의 재료가 된 원본 영상들로, 미군 통신대대가 촬영했거나 항공기에 달린 ‘건 카메라(gun camera)’가 찍은 현장이 담겼다. 제작진은 이들 영상에서 미군이 홍보한 정밀폭격과는 전혀 다른 융단폭격과 기총소사 등으로 특정 지역을 초토화하는 무차별 폭격 양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 네이팜탄을 달고 작전 중인 미 해군 콜새르 전폭기

하늘에서 내리던 “죽음의 화염” 네이팜탄

미군의 초토화폭격에는 대표적 비인도적 무기인 네이팜탄이 자주 사용됐다. 미군 통계보고서에 따르면 미 공군은 한국전쟁 3년여 동안 한반도에 32,000톤이 넘는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네이팜은 가솔린에 알루미늄 성분을 섞어 만든 젤리 형태의 혼합물로 미군이 2차 세계대전 중 개발한 소이탄의 일종이다. 한국전쟁에 사용된 네이팜탄은 구식 소이탄보다 더 오래, 더 넓은 곳을 불태울 수 있었다.

이미 한국전쟁 당시에도 네이팜탄 사용은 비인도적 전쟁 행위로 여겨져 국제사회의 규탄 대상이 되곤 했다. 이때 영국의 한 시민단체가 발간한 팸플릿은 “네이팜탄에 노출되면 즉시 불타 죽거나 영구적으로 실명한다”고 설명하며 네이팜탄의 잔인성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 공군이 제작한 영상들은 네이팜탄의 위험이 아닌 위력만을 한결같이 강조한다. 미군이 제작한 ‘한국전쟁 미군 전황 필름(Combat Bulletin)’은 네이팜탄을 두고 “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라고 묘사하며 “적을 쓸어버리는 데 효과적”이라고 평가했다. 유엔군의 일원이었던 호주 공군의 활약을 선전한 ‘호주의소리(The Voice of Australia)’ 영상은 호주 공군과 미 공군이 합동 작전을 펼친다고 설명한 뒤 네이팜탄이 “죽음의 화염을 적진에 뿌린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기 이 “죽음의 화염”이 뿌려진 곳은 적진만이 아니었다. 네이팜탄은 민간인 거주지에도 투하돼 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숱하게 앗아갔다. 1950년 9월 10일 인천 월미도 민간인 거주지를 모조리 태워버린 네이팜탄 폭격, 1951년 1월 20일 단양 곡계굴에 피신하고 있던 마을 주민과 피난민을 질식사시킨 네이팜탄 폭격 등이 그러했다. 1951년 2월 수원 인근 한 응급구호소에서 네이팜탄으로 인한 화상을 치료받던 여성 피해자들의 사진 또한 네이팜탄의 잔인함을 증명한다. 

▲ 유엔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화상을 입은 여성 피해자들이 수원 인근의 야전응급구호소에서 치료받고 있다.

미군 카메라에 박제된 폭격의 위력과 삭제된 민간인 피해

미군 폭격에 동원된 무기는 네이팜탄뿐만이 아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38만여 톤의 파괴폭탄 등이 한반도에 퍼부어졌다.

뉴스타파필름이 4K 고화질 영상으로 제작한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초토화폭격’ 후반부는 서울, 평양 등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북한 주요 도시의 모습을 담았다. 미군 폭격기가 휩쓸고 간 청진과 함흥 등 북한 도시에서는 멀쩡한 건물을 거의 볼 수 없다.

미군의 초토화 폭격을 목격한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71년이 지난 지금도 그 참상을 잊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1950년 8월 29일 경북 포항 칠포리 폭격 당시 10살이었던 신임조 씨는 민간인 거주지를 노린 미 공군의 무차별폭격으로 아버지와 할머니를 잃었다. 해당 사건은 미 공군이 작성한 ‘임무보고서’에도 드러난다. 문서에 “칠도동(Childo-Dong)”으로 표기된 곳이 칠포동(현 칠포리)의 오기라는 사실은 당시 미군이 사용한 작전 지도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 1950년 8월 29일 포항 칠포리 일대를 폭격한 미 공군 ‘임무보고서’와 당시 미군이 사용한 작전 지도 (칠포리에 해당하는 좌표 1236-1473 구역 붉은색 표시는 제작진)

칠포리 폭격 이틀 전인 8월 27일에는 이곳에서 1km 남짓 떨어진 용한리 해변에 모여 있던 피난민 100여 명이 또 다른 미군 폭격으로 희생되었다. 이날 용한리 해변 폭격을 수행한 조종사가 작성한 임무보고서는 미군 폭격기를 향해 “흰 천을 흔들던 흰 옷을 입은 무리를 폭격했다”고 서술한다.

한국전쟁 중 미군 폭격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한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군 관련 희생으로 신고된 전체 희생자 5천여 명 가운데 90%인 4천8백여 명이 미 공군 폭격 관련 사망자였다.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초토화폭격’은 미군이 촬영한 영상과 작전 관련 문서, 그리고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조사 결과 및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전쟁 중 미군 무차별폭격이 초래한 민간인 희생과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폭격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연출 김용진 최윤원
취재 이명주
촬영 최형석 이상찬
편집 윤석민
CG 정동우
디자인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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