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고 시대를 엄정하게 통찰해온 그이지만, 최근엔 말을 아끼듯 인터뷰나 강연 요청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난 9월 모 언론사에서 창간 기념 인터뷰를 거듭 요청했지만,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다며 극구 사양했다.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만들어질 경우, 기조 연설이나 특강의 형식보단 방담 또는 대담 같은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생각을 두루 나눌 수 있는 자리를 원했다. 지난 9월, 참여연대 창립 27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청년 회원과의 대화의 자리가 대표적이다.
겸양이 몸에 밴 탓일까. 아니면 불통과 혐오·증오가 판을 치는 언론 현실에서 소통의 가치가 더욱더 귀해진 것일까. 김중배 뉴스타파함께재단 이사장은 이렇게 일방향 소통이 아닌 ‘제한 없는 상호 소통’을 강조한다.
지난 11월 27일, 한국언론정보학회가 가을 정기 학술대회를 맞아 <김중배 선언 30년의 현재적 의미>라는 특별 세션을 마련했다. 이날 행사도 김중배 이사장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아닌 여러 명이 나와 더불어 생각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공교롭게도 이번 언론정보학회 정기 학술대회 주제가 “지속 불가능한 사회와 지속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 11월 27일, 서울 정동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교육원에서 한국언론정보학회 가을 정기 학술대회가 열렸고 <김중배 선언 30년의 현재적 의미> 대담이 마련됐다.
“여태까지 해왔던 어떤 진행보다도 마음이 무겁거든요. 뭔가 한마디를 할 때 선생님께 혼나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공부를 안 하고 온 거 아닌가? 굉장히 초조한 마음이 드는데 지금부터 1시간 반 동안 그런 부담을 버리고 편안하게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도 여쭤보고, 선생님이 오히려 저희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도 있다고. 하시니까요. 그야말로 대담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1.11.27. 박선희 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조선대 교수)
▲ (왼쪽부터) 김서중 성공회대 미디어컨텐츠융합자율학부 교수, 김중배 뉴스타파함께재단 이사장, 김언경 미디어인권연구소장, 김은지 시사인 기자
이날 대담에는 김중배 이사장, 김서중 성공회대 미디어컨텐츠융합자율학부 교수, 김언경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소장, 김은지 시사인 기자 등 4명이 참여했다. 대담에 앞서 김중배 이사장의 소개가 있었다. 김서중 교수는 세 가지 키워드에 담아 김 이사장을 설명했다.
▲ 김서중 성공회대 미디어컨텐츠융합자율학부 교수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김중배 선언’, “실천인 김중배”
① 1987년 박종철 열사의 죽음 앞에서 독재 정권의 야만성을 일갈한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② 이날 대담의 주제였던 1991년 자본의 언론 통제가 권력의 통제보다 더 무섭고 집요하다는 시대 상황을 논파한 ‘김중배 선언’ 그리고 ③ 동아일보를 떠난 후 한겨레·MBC 사장, 참여연대·언론개혁시민연대·언론광장 대표 등 ‘실천인 김중배’의 삶이다
김 이사장은 1957년 한국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동아일보에서 16년 동안 논설위원으로 재직했으며, 지금까지 언론계와 시민 사회에서 실천을 멈추지 않는 ‘현역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2014년 독립언론 뉴스타파 99%위원장에 이어 지난해부터 뉴스타파함께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중배 선생님이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박종철 열사가 죽은 것도 억울한데, 정권이 그것을 은폐하고 다른 의미만 거기에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죽은 박종철 열사를 두 번 죽이려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시려는 게 큰 의미가 있죠. 언론이 어떤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두 번 죽이는 일을 그 이전에도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행해집니다. 이런 문제에 핵심을 찌르는 거라는 점에 대해 우리가 같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도 누군가가 억울하게 죽은 것들을 전하면서 왜곡된 의미를 전달하는 그런 것들을 많이 보죠.” (2021.11.27. 김서중)
▲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를 맡을 당시 김중배 이사장 (출처 MBC)
Q ‘디지털 자본주의’에 맞선 인권·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김중배 이사장은 현재 한국 언론 앞에 새로운 자본 권력이 등장했다고 진단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휴대전화를 통해 개인이 어디에 있는지 동선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상황(QR코드 카카오로 연계한 신분 확인)을 빗대어 ‘디지털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AI, 4차산업, 플랫폼 경제 등 효율성과 무한 이익을 앞세운 새로운 형태의 자본과 시장 만능주의에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킬 방안이 무엇인지 언론인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또 다른 자본 권력의 탄생과 또 다른 형식 또는 역량을 가진 자본의 압제 하에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플랫폼 자본주의’ 또는 ‘디지털 자본주의’입니다. 이젠 신분 확인이라는 국가적 업무를 카카오 앱을 통해서 진행합니다. 공공의 측면까지 자본이 압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이런 것들이 어쩌면 아날로그 시대의 자본 권력보다 더 우리를 압도해 가지 않을까. 이 점을 매우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1.11.27. 김중배)
언론에 대한 자본의 통제는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올해 1월 발표한 ‘2019 언론인 조사’에 따르면, 언론인들이 생각하는 ‘언론의 자유를 직·간접적으로 제한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광고주(68.4%)를 가장 많이 꼽았다. 그다음으로 편집·보도국 간부(52.7%), 사주·사장(46.4%), 기자의 자기 검열(32.5%), 정부·정치권(27.4%), 언론 관련 법·제도(25.2%) 순이었다. (2020.01.13, 경향신문 참고)
“저널리즘 원칙은 거듭 강조되고, 끝내 강조돼야 하고,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사태는 이 강조만으로 풀어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지털 자본주의, 플랫폼 자본주의, 빅데이터가 저지를 수 있는 인권의 침해를 염두에 두고 디지털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는 ‘디지털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빅데이터 자본의 악용을 방어할 수 있는. 그런 것을 깊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2021.11.27. 김중배)
▲김은지 시사인 기자
Q. ‘기레기 담론’ 어떻게 봐야 할까?
“오늘 뵈면 여쭤보고 싶긴 했었습니다. 가장 화제가 되는 말이 기레기라는 말이잖아요. 기자로서는 너무나 아픈 말이고 속상한 말이기도 하고, 어떤 지점에서는 억울하기도 하고 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건도 있습니다.” (2021.11.27. 김은지)
2009년 언론계에 들어온 ‘후배 기자’ 김은지 시사인 기자는 ‘기레기 현상’에 대한 김 이사장의 생각을 물었다. 김 기자는 ‘기레기’라는 단어의 의미와 담론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먼저 우리가 오보를 쓰거나 혹은 무리한 단독 욕심을 내거나 소위 기자만 아는 단독이라고 하죠. 본인이 가장 먼저 알았으니까 먼저 쓴다, 이런 놀림과 비판도 기자들 사이에 있는데요. 그런 기사 내용이 틀리거나 아니면 정확하지 않거나 혹은 의미 없는 단독 욕심을 부렸을 때 그리고 어뷰징하는 기사를 썼을 때 오는 독자로부터의 비판이 ‘기레기’라는 지점이 있는 것 같고요. 또 다른 지점은 요즘 더 고민되는 지점인데, 내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쓴다. 혹은 내 편이 아닌 것 같다는 지점에서도 ‘기레기’라는 비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김중배 선생님께서는 이런 현상 혹은 기레기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2021.11.27. 김은지)
김중배 이사장은 2015년 1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 친구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라는 질문에 ‘기레기’를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그는 “기레기란 말이 저널리즘 종사자에겐 대단히 모욕적인 지칭이지만, 뒤집어보면 시민들이 현존하는 저널리즘의 실체를 확인한 각성과 통찰의 결과다. 이것을 그냥 지탄으로만 보는 건 단견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내가 기자가 돼야겠다는 동기를 찾았으면 좋겠다. 나 같은 세대는 기자를 워낙 쉽게 해 먹었지만…”이라고 말했다.
6년이 지난 지금, 김 이사장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김 이사장은 ‘기레기 담론’에 대해 긍정도 부정의 태도도 내비치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기레기 담론’이 지닌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곳으로 향했다.
“언론 행위에 대한 비판은 축적에 대한 결과입니다. 진영 논리 그리고 확증 편향이라는 얘기는 요즘 많이 하는데, 그러면 그 이야기만 하고 나면 끝이에요. 더 나아갈 필요가 없잖아요. ‘진영 논리 때문에 그래’, ‘확증 편향이야’. 그러면 끝이에요. 논리나 분석의 진전이 멈추는 거죠. 우리는 그렇게 갈라졌다면 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이는가. 어떤 요인들이 그렇게 갈라놓았을까. 그래서 그런 구성 속에서 소위 진영 논리라는 이런 논리가 구성되는 어떤 필연성, 이런 것을 우리는 유추할 수 있을 것인가. 뭔가 이런 분석이 조금 우리는 더 진전되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해요. 우리는 한 발자국 더 들어가야 합니다.” (2021.11.27. 김중배)
Q. 현재 언론은 30년 전보다 더 망가졌는가?
이번엔 김 이사장이 각 패널에게 질문을 던졌다. 모 언론사의 논설위원과의 대화를 꺼내며 ‘우리 언론 수준이 이전보다 더 나빠졌는가?’ 물었다.
“제가 얼마 전에 소장 언론학자, 기자 경험 있는 어떤 분과 만나서 우리 언론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나빠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 논거의 하나로 몇십 년 전 있었던 ‘가짜 호랑이 기사(7페이지)’ 같은 허무맹랑한 오보를 예시로 들며, 지금은 더는 이런 기사는 없지 않으냐고 하더군요.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2021.11.27. 김중배)
“오보로 사회에 혼란을 끼친다는 점에선 과거보다 나아진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월호 당시에 ‘전원 구조 오보’ 이후에 정정이 됐다고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한테 줬던 언론에 대한 기본 신뢰 하락은 너무 컸다고 보거든요. 그러고 나서 그것에 대해 자성하겠다고 하고 재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글쎄요. 초를 다투는 속보 경쟁과 클릭 수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서 뉴스룸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의문입니다.” (2021.11.27. 김은지)
▲ 김언경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소장
“제가 민언련에서 언론 모니터링을 시작한 게 92년입니다. 그때는 매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 정도의 품위 그리고 품질은 지켜졌습니다. 어떤 자본 권력에 의한 통제는 분명히 있었고 그때도 선거 구도가 굉장히 엄청나게 편향적이긴 했지만 ‘예측 가능한 품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매체들이 생겨나 무한 경쟁을 하고 있고 우리가 말하는 기레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 자체가 많아졌습니다. 최근에는 연합뉴스 사례처럼 아예 광고성 기사를 쓰기도 합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수준이 더 낮아졌다고 생각합니다.” (2021.11.27. 김언경)
“저는 ‘기레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레기라는 말을 쓰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일상적으로 기레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의 현상은 우리가 바람직한 언론을 기대할 때 매우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설사 기레기라고 불려 마땅한 기사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저는 가려 써야 한다고 하는 큰 이유가 우리가 언론 현상을 보면서 화나고 짜증 날 때가 많지만, 저는 그래도 느끼는 것은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좋은 기자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실제로 양질의 콘텐츠만 접하며 살 수 있을 만큼 생산되고 있습니다.” (2021.11.27. 김서중)
Q 망가진 언론생태계를 바뀔 수 있는가?
김서중 교수는 ‘현실적으로 모든 언론이 좋아질 수는 없고, 망가진 언론 생태계의 지형을 바꾸려고 나서는 이른바 ‘선도 언론’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중배 이사장의 생각은 어땠을까? 결기 있게 ‘선도 언론’이 나서기 위해선 이를 북돋아주는 ‘선도 시민’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화답했다.
▲ 김중배 뉴스타파함께재단 이사장
“칼 폴라니의 말에 그런 게 있어요. ‘만유인력’이라는 게 잡아당겨서 우리가 땅에 붙어 있으라는 게 아니라 그 땅의 중력을 박차고 뛰어오르라는 것이다. 그런 의지가 있을 수 있죠. 그러나 동시에 저는 (현직 언론인의 )결기가 살아날 수 있는 토양을 갖고 나가는 노력을 ‘선도 시민들’이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요.
조회 수에 따라서 광고비가 나오고 아무리 좋은 게 있어도 클릭이 안 되면 사장이 되어버리는 이런 현실을 견디라고 할 수 있는가. 정말로 저항하기 어려운 조건을 모든 사람(기자)에게 극복하라고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이제 늙어서 용기가 다 사라져서 그런지 몰라도 강요하기 어려운, 강요하기에는 나 자신이 괴로워요. 그런 심정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 교수가 ‘선도 매체’라는 말을 했는데, 반대로 ‘선도 시민들’이 극복하려는 결기를 가진 기자가 살아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에 무게를 더 싣고 싶습니다.” (2021.11.27. 김중배)
글 장광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