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터지는 너털웃음은 김중배 선생의 트레이드마크다. 그 호방한 웃음은 마주 앉은 이의 경계를 속절없이 허물어 버린다. 그러나 그가 뭔가를 응시할 때 옆 모습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심연과 가을 서리 같은 서늘함을 풍긴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그 호방함과 서늘함 사이를 오가며 김중배 선생과 수작(酬酌)을 했다. 조봉암(진보당) 사건, 4.19 혁명 재판부터 촛불혁명까지. 명동 다방부터 충무로 학생주점까지. 하버마스와 맥루한, 들뢰즈에서 진화생물학과 뇌과학, AI까지. 그의 수작은 종횡무진 거침이 없었다. 불현듯 우리는 그와 나눈 수작을 우리만 간직하는 건 이 사회에 큰 손실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수요일엔 김중배와 수작을> 연재는 이런 각성에서 시작한다. -편집자 주  

2024년, 서울은 몇 시인가

하늘은 밝은데도 아직 우리의 시야는 안갯속처럼 흐리다. 가슴은 닫혔는데도 흙바람이 몰아오는 먼지들이 심장에 내려앉는다. 나침반은 방위를 가리키지 못한다. 시침(時針)은 우리의 시간을 제대로 지시하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해가 저물어가는 서산을 지켜보면서 다시 ‘게오르규’ 씨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아니, 나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오늘 서울은 몇 시인가.

1982년 5월 15일 토요일, 동아일보 기명 칼럼 <그게 이렇지요-김중배 세평>은 “오늘 서울은 몇 시인가”라는, ‘서늘한’ 물음으로 끝맺는다. 김중배 논설위원(당시 48세)은 그날도 팽팽한 긴장 속에 자기 이름을 건 칼럼을 신문에 내고 늦은 귀갓길에 올랐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막 집 대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괴한 3~4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부장님이 뵙자고 하십니다.”

당시 상황을 김중배 선생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는 단독주택에 살았는데 집 앞 골목에서 서너 명이 차에서 탁 내리더니 ‘우리 부장님이 뵙자고 합니다’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서 안기부에서 왔다고 해요. 그래서 알겠다, 그래 좋다고. 일단 집에 들어갔다 나오겠다고 했더니 안 된다는 거야. 아니 내가 내 집에 왔으니 일단 들어갔다가 나오겠다고 하고 그냥 막 들어가버렸어요. 그랬더니 그놈들이 신발도 그대로 신고 쫓아들어오더라고.”

마침 이날 우리와 김중배 선생의 ‘수작’ 자리엔 부인 안행자 여사도 함께 했다.

“사모님, 많이 놀라셨겠네요”

“매주 토요일에 칼럼을 쓰셨는데 그날은 장영자 사건을 다루셨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빨리 안 오시더라고요. 불안하죠. 귀가 시간이 지나고 밤이 되니까 불안해서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데 우리 옆집에 차가 하나 서 있었어요. 까만 차가. 그래서 저 차가 혹시 그 차인가 해서 자꾸 마음으로 불안했어요. 옆집 남자가 도박을 좋아해서 도박 친구들이 그 집에 타고 온 차였는데, 나는 그 차가 감시하는 차인가 해서 계속 불안해 한 거죠. 그러던 중에 남편이 집으로 딱 들어오시면서 벨을 눌러서 내가 그냥 뛰어나가서 문을 여는데, 아 사람들이 확 들어와서는 그냥 그대로 끌고 나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가방이라도 방에 놓고 가시려는데 구두 신은 채로 안방까지 들어오더라고. 그렇게 남편이 끌려가니까, 아 그때 처음 당하는데 너무 황당하고 아주 그냥 가슴이 무너지더라고요.”

“안기부 직원들이요?”

“네, 네 안기부”

“그때가 몇 시쯤이었죠?”

“한밤중, 12시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때 칼럼 쓰실 때는 토요일마다 신문에 나갔으니까, 그냥 토요일은 더 불안한 거예요. 남들이 말하는 주말이 뭐 어쩌고 그런 것은 딴 세상이고, 오늘은 남편이 제대로 집에 들어와서 편안할까, 늘 조마조마했죠. 칼럼 쓴 동안 내내”

“끌려가신 날 나온 칼럼이 바로 ‘장영자 사건’ 관련 칼럼이죠?”

“제목이 ‘서울은 몇 시인가’였지” 김중배 선생이 거들었다.

1982년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폭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 대다수 언론사가 눈과 귀와 입을 가리고 있을 때 동아일보에 ‘그게 이렇지요-김중배 세평’이라는 기명 칼럼이 등장했다. 김중배 논설위원은 자기 이름을 내건 칼럼 첫 편을 “입술 떨려도 진실만은”이라는 제목으로 써냈다. 1982년 3월 6일이었다. 이후 매주 토요일 나온 김중배 칼럼 ‘그게 이렇지요’는 얼어붙은 땅에 솟구친 푸르른 솔 같았고, 시쳇말로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 

그러나 안행자 여사에게 토요일은 늘 조마조마했다. 주말같지 않은 주말이었다. 김중배 칼럼은 불과 2개월만에 정보기관의 주목을 끌었고, 5월 15일 마침내 ‘부장님’의 부름을 받았다.

‘서울은 몇 시인가’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국가 최고 정보기관(물론 대통령 심기 경호도 했다.)인 안기부를 출동하게 만들었을까. 이 칼럼은 1982년 5월 4일 터진 이른바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다뤘다. 장영자는 전두환의 처삼촌, 즉 이순자의 삼촌 이규광의 처제였고, 이철희는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전신) 차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철희 장영자 부부는 전두환-이순자라는 절대권력을 등에 업고 무려 6400억 원대 어음 사기 행각을 벌였다. 

김중배 칼럼은 바로 이 이철희 장영자 사건을 겨눴다. 대다수 언론이 사건의 배후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할 때 ‘그게 이렇지요’는 이렇게 신랄했다.

잇달아 들려오는 이웃들의 한숨도 귀에 못을 박는다. 밤을 새워 일하고도 우리는 한 달에 몇 십만 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한탄은 사회의식의 병리가 번져가는 물결소리로 들린다. 행정형 부패는 권력형 부패를 낳고, 다시 권력형 부패는 사회의식형 부패를 낳는다는 통설이 현실로 살아나는 풍경이다.(중략)

청렴을 말하는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른다. 책임의 함수인 권력을 초능력으로 착각한다. 그 이중 기준의 종착역은 처참하다.(중략) 

경국의 부패는 흔히 알려진 대로 절대권력을 온상으로 삼는다. 그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기 싫은 이번 사건만 보더라도 그렇다. 설령 백보를 양보해서 호가호위의 놀음이었다 할지라도 호랑이 없이 여우가 위세를 부릴 수 없다.

‘절대권력’, 호가호위의 ‘호랑이’는 이름만 안 썼다뿐이지 전두환을 지칭하는 게 분명하다. 위험한 칼럼이다. 1982년이 어떤 시절인가. 목숨을 걸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글이었다. 

시사 칼럼을 넘어 한 문장 한 문장이 말 그대로 절창이다. 하지만 김중배 칼럼은 여기에 또 다른 장치를 넣어 권력형 비리를 단순히 꾸짖는 수준을 넘어선다. 바로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다. 

일찍이 서울을 다녀간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씨는 나의 물음에 여태 대답이 없다. 그때 나는 서울의 게오르규 씨에게 물었던 것이다.(중략)

그러나 시련받는 시민, 고달픈 민은 버젓이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도 오늘의 시간을 종잡을 수 없다. 의문부만으로 가슴을 맞댈 수밖에 없는 동방의 오늘을 당신은 끝내 서방에의 빛이라고 고집할 수 있는가. 서울의 게오르규 씨,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오늘 서울은 몇 시인가.

게오르규의 대표작 ‘25시’에서 가장 인상적 장면 중 하나는 ‘잠수함과 토끼’다. 함내에 산소 농도를 측정하는 장비를 개발하기 전에 해군은 잠수함에 흰 토끼를 태웠다고 한다. 토끼는 산소 농도에 민감해 산소가 부족해지면 인간보다 수 시간 빨리 죽기 때문에 이를 보고 바로 대처하기 위해서다. 1차세계대전 때 잠수함 수병으로 복무한 게오르규는 ‘25시’에서 자신이 토끼 못지 않게 산소에 민감한 특성이 있어 수병 시절 잠수함의 토끼 역할을 한 경험을 서술했다.

“내가 탄 잠수함에는 산소 측정기가 있었기 때문에 흰 토끼 같은 건 없었어. 그런데 나는 산소 양이 조금만 줄어도 금세 알아차렸어. 처음에 사람들은 내 지나친 민감성을 조롱했지. 그러다가 그들도 나중에는 기계를 보는 대신 나를 관찰하게 되었어. 산소 과부족을 나는 기계만큼이나 정확하게 알아맞혔으니까 말이야. 다른 사람보다 산소 부족을 여섯 시간-먼저 알아낸다는 것, 이건 우리-즉 흰 토끼와 나-의 천부적 재능이야.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나는 그 옛날 잠수함을 탈 때처럼 공기가 희박해져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게 됐어.”

“어디 공기 말예요?” 노라가 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 전체의 공기 말이야. 사람들은 그속에서 호흡곤란증에 걸려 있어. 관료주의, 군대, 정부, 국가조직, 행정부 등 모든 것이 인간을 질식시키고 있거든”(중략)

김중배 칼럼은 바로 게오르규가 쓴 ‘25시’에 착안해 마침 서울을 다녀간 작가를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서울은 몇 시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잠수함과 흰 토끼의 시간은 바로 숨 쉴 수 있는, 즉 생존이 가능한 시간을 말하지만 김중배가 던진 질문은 서울, 즉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숨통이 기능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였다. 급속히 질식해가는 한국 사회의 생존 시간을 물은 것이다.

이쯤해서 1982년 한밤중 남산 안기부에 끌려간 김중배 선생의 안부가 궁금해질 것 같다. 

“그래서 남산에 가셔서 ‘부장님’은 만났습니까?”

“부장은 무슨 부장 하하하 그냥 걔들이 하는 소리지 하하하” 호방한 웃음이 사정없이 터져나왔다. 

부장실 대신 지하 취조실로 김중배 선생을 끌고 간 안기부 요원들은 칼럼 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내가 경제를 잘 모르고 경제학도 모르잖아. 그런데 그럴수록 자꾸 그 시대에 경제를 모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경제학을 조금씩 들여다보곤 했어요. 그런 바탕으로 그 칼럼에 어떤 이론이 있다. 경제학에 이런 게 있다. 뭐 이런 식으로 썼는데, 안기부 애들이 그게 맞냐고, 그게 말이 됩니까? 어쩌고 따지면서 그러는데. 아니 이게 어떤 저명한 세계적인 경제학자의 이론이고 내가 그걸 인용해서 썼다고 그랬지. 그랬더니 취조를 딱 중단해. 그러더니 한참 자기들끼리 왔다 갔다 하더니 1시간인가 1시간 반쯤 뒤에 다시 들어오더니 “아까 그 얘기는 그만두자”고 하더라고. 어디서 조언을 받은 거야. 전문가들이 있어요. 학자 중에. 이들의 검증을 받았는가봐. 그 얘기는 이제 더 안 하기로 했다, 이러는 거야.”

김중배 칼럼이 인용한 학설은 세계적인 학자의 조세 정의 관련 이론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선생을 끌고 갔던 안기부 요원은 제풀에 꺾였다. 그 다음 날, 일요일 오후 김중배 선생은 다행히 고문 같은 건 받지 않고 풀려났다. 

김중배 선생은 그날 안기부 취조실의 경험, 그리고 윤석열 검사의 등장을 떠올리면 리영희 선생이 쓴 ‘D검사와 이 교수의 하루’가 떠오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김중배 선생은 1982년 5월 15일 게오르규의 ‘25시’ 잠수함과 토끼를 소재로 칼럼을 쓰고 9년 뒤, ‘김중배 선언’을 남기고 동아일보를 떠난다. 정치권력보다 자본권력이 언론에 더 영속적인 위협이 될 거라는 예언이었다. 30년도 더 전에 김중배는 한국 언론, 한국 사회에서 잠수함의 흰 토끼 역할을 한 것이다. 

글 김용진 

편집 조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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