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터지는 너털웃음은 김중배 선생의 트레이드마크다. 그 호방한 웃음은 마주 앉은 이의 경계를 속절없이 허물어 버린다. 그러나 그가 뭔가를 응시할 때 옆 모습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심연과 가을 서리 같은 서늘함을 풍긴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그 호방함과 서늘함 사이를 오가며 김중배 선생과 수작(酬酌)을 했다. 조봉암(진보당) 사건, 4.19 혁명 재판부터 촛불혁명까지. 명동 다방부터 충무로 학생주점까지. 하버마스와 맥루한, 들뢰즈에서 진화생물학과 뇌과학, AI까지. 그의 수작은 종횡무진 거침이 없었다. 불현듯 우리는 그와 나눈 수작을 우리만 간직하는 건 이 사회에 큰 손실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수요일엔 김중배와 수작을> 연재는 이런 각성에서 시작한다. -편집자 주
- 수작 1. 2024년, 서울은 몇 시인가
- 수작 2. 내가 뭐 해먹은 게 있었나
- 수작 3. 언론이란 무엇인가
- 수작 4. 천지신명 이야기
- 수작 5. ‘함께’와 ‘판문점’
- 수작 6. 역사의 수레바퀴
- 수작 7. 언론인이여, 공부 좀 하자
- 수작 8. ‘법정이라는 인생극장’
- 수작 9. 정치깡패가 정치깡패가 니체를 들먹인 이유
- 수작 10. ‘양초의 철학’과 한강의 흰
힘든 나날이다. 김중배 선생과의 수작도 윤석열 정부 들어와서 무거운 주제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가?”하는 얘기다. 하루는 수작을 나누던 중 이런 말씀을 했다.
“어젯밤인가 그젯밤인가. 100분 토론을 보는데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그래. ‘국민들이 궁금하다. 아니 이 정권이 뭘 하겠다는 건지 그걸 좀 알려달라’ 이거야. ‘그럼 거기에 대해서 비판을 하든지 보완을 하든지 하지. 뭘 꼭 하겠다, 그런 게 있으면 그걸 좀 알려달라고. 그걸 모르겠다.’ 그렇게 역설을 하더라고, 토론 마지막에”
“진짜 궁금하긴 궁금해요. 도대체 윤석열 정권은 뭘 하겠다는 건지”
“내가 보기에 자기 붕괴의 길을 타고 가는데. ‘자봉 사태’, 그런 말이 있던데 자기 붕괴야 그들의 자업자득이니까 뭐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 과정에 국민들이 피해를 보고 아프게 된단 말이에요. 그거는 그냥 놔둘 수가 없잖아요. 아니 참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멀쩡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자꾸 좌절하고 있다고. 나라라는 게 세상이란 게 이렇게 운영되면 안 되잖아요.
지난 11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문 발표와 기자회견을 보고 이런 의문과 답답함은 절정에 달했다. 하루 24시간, 주 7일 내내 노심초사 국민을 위해 뭘 한다는데, 뭘 하는 건지 더 궁금해졌다.
용산발 희대의 국기문란은 상상을 뛰어넘고, 대통령의 거짓말은 골프 사태로 점입가경이다. 김중배 선생과의 수작이 또 떠올랐다. 이런데도 국민들은 박근혜 때와 달리 왜 광장으로 선뜻 나오지 않을까? 청년, 학생들은 왜 분노하지 않을까?
“지금 보면 생존하는 데도 숨이 막히는데 그것까지 생각하라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아니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고. 먹고 살기가 하루에도 숨이 벅찬데. 사회 경제적인 조건 자체가, 구조 자체가 달라졌어. 공기가 달라진 거야. 이 사회의 공기가. 그러니까 과거에는 지금보다 그렇게 못살아도 그속에서 고민하고 했잖아.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그런데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굉장히 무리하다는 생각, 그런 느낌이 들어.
“그런데 어떤 세대든, 아니면 어떤 계급이든 집단이든 미래를 좀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가 있어야 할 텐데 이게 참. 예전에는 대학생들, 노동조합 조직 등이 나섰는데 지금은 서로 다 기대를 안 하는 것 같아요”
“대학생, 젊은이들이 그런 고민의 용광로였고 그래서 거기서 운동도 나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쉽지 않아”
얘기는 돌고 돌아 선생이 최근 살고 계신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 때문에 한 달간 딸 집에 가서 체류한 경험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거기에 한 달 사는 동안 내가 그래도 책은 봐야지. 그런데 욕심은 안 부렸어. 딸네 집에 가서 사는데 책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나? 하지만 그래도 볼 건 봐야지, 3권 가져갔어. 굉장히 절제를 한 거지. 그중 하나가 독일에 있는 한병철 교수, <투명사회>, <피로사회> 쓴 교수의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인데 여러 편의 에세이를 실었어. 독일어판 제목은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이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비판이 골자야. 근데 그중에 혁명을 해야 된다, 해야 되는데 현실은 불가능한 것 같아 보인다, 그게 젊은이들 생각이다, 이렇게 질식할 것 같은 상태에서 사회 구조에 대해 모순을,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하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리고 생존하려면 이 모순된 구조, 좌우간 그 현실에 영합을 해야하는데 그래야 연명이 되는데 그걸 하지 말라고? 그럼 죽으란 말인가. 그런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한국 젊은이들을 얘기하는 건가요?”
“아니, 세계적인 현상을 말한 거죠. 그 양반은 철학자인데 주로 하는 게 자본주의 문제에 굉장히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줘. <피로사회>도 그런 거고, 착취 관계 이런 것들. 그걸 짚어내는 데, 괜찮아.”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결론적으로는 이런 취지의 얘기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우리 자신을 총체적 감시와 착취에 내맡기고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포기하고자 하는가? 다시 함께 저항을 조직할 때다.
“따님 댁에 가지고 가신 또 다른 책은 뭡니까?”
“아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라고. 재밌는 책이에요. 근데 진도가 잘 안 나가. 뭐 내가 어거지로 책을 읽어야 될 필요는 없는 사람이잖아요.”
“저도 오늘 이사장님께 드리려고 책 한 권 가지고 왔습니다. 저와 한상진, 봉지욱 기자가 썼는데요, 압수수색이라고 하하”

박근혜 시절을 능가하는 윤석열 정권의 무능, 무도, 국정문란 사태를 매일 지켜보면서도 왜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을까, 거리로 나오지 않을까, 이런 얘기를 나눈 끝에 김중배 선생이 오래 전 쓴 칼럼이 떠올랐다. 과연 시민, 국민 탓만 하고 있을 일인가?
침묵하는 민중은 일이 없거나 할 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켰던 건 아니다. 침묵은 결코 무성(無聲)은 아니었다. 침묵은 오히려 대성(大聲)이었다. 이런 때 “무성은 오히려 대성”이라는 옛말이 떠오르는 건 아픔을 더욱 저리게 할 뿐이다.
미심쩍거든 어미새의 품에 안긴 알들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겉모양은 죽은 알이나 산 알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부화의 생명이 피어나는 알을 평면 위에 놓으면 살아서 움직인다. 그 알의 목소리가 어미의 귀에 들리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때가 익으면 알은 깨어지고 새 생명의 목소리가 땅위에 울린다.
나는 그 ‘알의 통신’을 신문기자로서의 좌우명으로 간직한다. 정지된 가운데서도 신문기자는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들리지 않는 가운데서도 울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김중배 칼럼 ‘신문기자, 당신들’ 중에서. 1983.6.18.)
글: 김용진
편집: 조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