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날] 日 ‘쉬쉬’해도 조선牛 약탈 이유 차고 넘쳐

일본으로 간 조선牛③

2017년, 5년마다 열리는 일본 와규 공진회에서 우승한 흑모 와규. 사진= 김관석 교수 제공

“일본의 와규(和牛)와 한우 사이의 유전적 연관성에 관한 연구는 학문적 교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우리 소에 관한 정보를 많이 구축하고 있지만, 우리는 와규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관석 충북대학교 축산학과 교수의 말이다.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교에서 ‘분자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관석 교수는 이 분야의 전문가다. 김 교수는 2009년 미국 미주리대학교가 전 세계 30여 개 기관과 함께 수행한 <소 대표 품종 55개의 유전적 비교 연구>에 한국을 대표해 참여했다.

“연구 결과를 ‘계통도(系統圖)’로 그렸는데, A와 B 두 가지 방식의 조사에서 모두 한우와 와규가 가장 가깝다고 나왔습니다. ‘두 소의 DNA는 95% 이상 일치하며 일본의 와규는 한우의 후손으로 보인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결과가 「PNAS」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렸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연구는 각 나라에서 낸 자료를 미주리대 연구소가 취합하는 방식이어서 김 교수가 직접 일본의 자료에 접근해 직접 비교할 수는 없었다.

김 교수는 전통적인 한국 소의 뿌리가 오히려 일본 와규에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흑우와 칡소 등 우리의 다양한 소 종자를 일본으로 이출했고, 한국 소는 누런 소로 품종을 단일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1960년대 이후 고기의 양을 늘리고, 지방을 체내에 축적하기 위해 외국 소와 활발히 교잡해 전통 한우의 원형을 잃었다는 것이다.

“일본 인구 1억2000만 명에 전통 와규는 250만 마리 정도에요. 우리는 남한 인구 5000만 명에 한우라고 부르는 소가 350만 마리 정도니까 일본이 전통 소를 훨씬 더 협소하게 분류하고 보존하죠. 다만 일본 와규는 털이 검은 흑모 와규가 90% 이상이고, 갈색 털 갈모 와규는 수량이 적습니다.”

사람도 체형의 차이가 크게 때문에 한우와 와규의 체형을 단순 비교할 순 없지만, 일반적으로 현재 한우의 덩치가 와규보다 큰 건 분명하다. 아시아계의 소는 어깨에 혹이 있는 견봉우(肩峯牛) 계통이며, 우리 소와 일본 소는 같은 계통의 이동 경로에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그 먼 옛날 ‘소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일본이 근대인 일제강점기에 우리 소를 매우 계획적으로, 집요하게, 방대한 수량(150만 마리 이상)을 이출했다는 점이다. 이는 미디어 날이 앞서 <일제강점기, 조선 소 150만~180만 마리 끌려가>, <일제, 지역별로 소 부리는 소리까지 채록> 등 두 편의 기사를 통해 보도한 바 있다.

김관석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조선 소 이출에 관해서는 일본이 그동안 ‘쉬쉬’해 왔던 까닭에 이 같은 사실을 드러내는 연구는 일본도 역사가 깊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帝国日本と朝鮮牛(제국 일본과 조선 소)』는 일본에서 1949년에 태어난 장윤걸(蔣允杰)이라는 동포(현 국적 확인 안 됨) 연구자가 2023년에 발행한 책이다. 사진= 이재표

김 교수는 문헌 검색을 통해서 일본 지인의 도움으로 구입한 두 권의 책을 보여줬다. 이 중 『帝国日本と朝鮮牛(제국 일본과 조선 소)』는 일본에서 1949년에 태어난 장윤걸(蔣允杰)이라는 동포(현 국적 확인 안 됨) 연구자가 2023년에 발행한 책이다. 김 교수는 이 책의 일부를 번역한 상태에서 연구 중이다.

규슈(九州)대학교 한국연구센터 학술연구원이기도 한 저자는 『帝国日本と朝鮮牛』에서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의 축산기사로서 일을 하고 있던 ‘마츠마루’가 전쟁 직후에 쓴 『조선 소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나서야 일본에서 조선 소를 사역우(事役牛)로 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장윤걸 연구원은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관련 업무를 했던 일본인들의 기록을 뒤져 이 책을 썼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위에 언급한 ▲조선총독부 축산기사 마츠하루 외에도, ▲수의사로서 축산회사를 경영하고, 쿄죠부회(京城府會, 현 서울시의회) 부의장이 된 히즈카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소속 수의사로서 조선 소 이출 업무를 맡다가 이출업에 뛰어든 모리타 ▲황해도에서부터 축산행정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조선총독부 식산국 축산과장이 된 요시다 등 모두 네 명이다.

장윤걸 연구원은 이들의 과거 저서를 인용해 일제가 어떤 필요에 따라 얼마나 치밀하게 조선 소를 이출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마츠하루 시마조는 “조선은 뒤에서 소를 몰며 명령어로 소를 조종하는 데 반해, 일본은 앞에서 고삐를 당기며 때리고, 심지어 엉엉 울기도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미디어 날의 기사 <일제, 지역별로 소 부리는 소리까지 채록>에서 일본이 우리의 소 부리는 소리까지 채록한 이유가 드러난 셈이다. 사역에 편리한 소뿐만 아니라 소를 부리는 기술까지 가져갔다는 얘기다.

“조선 사람들은 진정으로 소의 기분을 이해해 소의 자주성을 살리면서, 소가 자유로운 기분으로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소를 길들여 왔습니다.” – 마츠마루

저자들은 모두 조선 농지 면적을 소 한 마리가 작업할 수 있는 양으로 구분하기도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하루 경작’, ‘이틀 경작’ 등의 용어를 썼다는 것이다. 조선 소의 운반 능력에 대한 분석도 매우 치밀하다.

“암소의 등에 안장을 싣고 짐을 옮기는 낭비의 경우, 하루에 한마리로 50관(약 188kg)을 지고 6~7리(약 24~28km)를 갔다.” – 모리타

“달구지를 끌 때 적재량은 소차(小車) 60관(약 235kg), 큰 것은 150관(약 563kg) 내외를 보통으로 하고 있다” – 요시다

히즈카는 조선 소가 농후사료(콩, 곡식)보다 거친 사료(짚, 콩류의 줄기, 풀)를 주로 먹는 점을 강점으로 봤다. 당연히 사료비가 절감될뿐더러 강인함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배경에 관한 마츠마루의 분석은 씁쓸하다. 농민 대부분이 소작농이고 수확물을 지주들이 독점하는 사회 구조 탓으로 분석한 것이다.

춘궁기를 겪을 만큼 농민들이 굶주렸기 때문에 당연히 소에게 거치 사료를 먹였고, 농후사료를 먹이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강한 근성을 가진 소만 혈통을 잇게 됐다는 논리다.

소를 부리는 기술이 발달하고 축적된 배경으로는 소가 없는 농민들에게 소를 빌려주는 ‘예탁제도’가 발달했음을 예로 들었다. 고려 때에는 국가에서 이를 시행했고, 조선은 부자들이 소를 빌려주고 곡식으로 받았으며, 두레와 계(공동 소를 사는 계)로도 이어져 온 것을 자신들이 조합으로 수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관석 교수는 “일제는 이처럼 조선 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메이지 유신 이후의 육식 장려 정책, 일소 도입을 통한 농업혁명, 태평양 전쟁 당시 운반수단으로서 조선 소 이용 등 다양한 목적으로 소를 수탈했다”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한국 소가 누런 황소로 통일된 배경에 대해서도 “일본이 군용 가죽점퍼나, 군화, 허리띠 등에 사용하기 위해 황소 사육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주장했다.

※후속보도가 이어집니다. 이 취재는 <뉴스타파 함께재단>으로부터 취재비 일부를 지원받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재표 에디터, 공동대표 medianal3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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