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날] 조선牛 이출에 日, 사료‧해운‧도매업 부흥

일본으로 간 조선 소④ : 광고로 본 조선 소 이출산업

조선 소를 일본으로 실어 나른 운반선. 사진= ‘개정 조선 이출우’

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약 30여 년 동안 무려 150만 마리가 넘는 소를 자국으로 이출(移出)하는 과정에는 해운, 검역, 사양(飼養) 관리, 사료 제조, 유통 등 경제 각 분야를 총동원했다. 아니 조선 소 이출의 부가가치가 막대해 너도나도 달려들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이런 정황은 당시의 광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미디어 날이 앞선 보도에서 인용한 『개정 조선 이출우』라는 책에는 조선 소 이출과 관련한 각종 기업은 물론 중개업을 했던 개인사업자들의 광고가 열여섯 개나 실려있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발행한 이 책은 1927년(소화 2년) 9월 18일에 『조선 이출우』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가 1931년(소화 6년) 10월 31일에 개정판을 낸 것이다.

책을 낸 목적은 조선 소 입식을 권장하고 그 절차를 안내하기 위한 것인데, 광고는 개정판에만 실렸다. 그만큼 이 사업이 1930년을 전후해 절정을 이뤘다는 얘기다.

광고 중에는 전면 광고도 있고, 광고 지면이 2분의 1, 또는 4분의 1로 분할된 광고도 있다. 이중 전면 광고를 낸 곳은 ▲조선흥업주식회사(朝鮮興業株式會社) ▲동양축산흥업주식회사(東洋畜産興業株式會社) ▲성진가축주식회사(城津家畜株式會社) 등 이출 전반을 담당했던 회사들과 ▲일본운수기선주식회사(日本運輸汽船株式會社, 해운업) ▲풍국제분주식회사(豊國製粉株式會社, 사료) 등 모두 다섯 개 회사다.

성진가축주식회사는 회사 이름 이외에는 어떤 정보도 싣지 않았다. 또 조선흥업주식회사는 부산에 지점이 있으며, 지점장이 목흑은차(目黑銀次, 일본 발음 ‘메구로 긴지’로 추정)라고만 게재했다. 이 두 회사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어 세세한 알림이 불필요했던 듯하다. 스폰서, 즉 후원자였다는 얘기다.

미디어 날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사료DB’를 분석한 결과 ‘조선흥업주식회사’와 지점장 ‘목흑은차’에 관해서는 총독부 관보와 신문 기사, 인물정보 등에 각각 236건과 11건의 자료가 남아 있다.

조선흥업 부산 등 6곳에 지점

풍국사료 광고. 값이 싸고 품질이 좋은 다섯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자료= 정삼철 연구위원

조선흥업주식회사는 1904년 일본 도쿄에 본사를 창업했으며, 1905년 조선으로 진출해 부산, 황주, 대전, 경산, 삼랑진, 목포에 지점을 둔 것으로 확인됐다. 자본금은 300만 원이었다.

사업의 영역은 ①조선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업, 식림, 목축 경영 ②조선의 농사 개량에 관한 각종 사업, 농산물의 판매와 관련된 업무수행, 다른 곳에서 의뢰받은 토지 관리 ③조선의 창고업, 운송업, 대금업 수행 ④앞의 3항에서 언급된 사업을 조성할 수 있는 사업을 경영 등이다. 1935년을 기준으로 조선에서 경영하고 있는 농장은 논 4000여 정보, 밭 9800여 정보, 잡종지 700여 정보에 이른다고 나와 있다.

1936년에 발간한 <조선흥업주식회사 30주년기념지(朝鮮興業株式會社三十周年記念誌)>를 보면 일본이 1883년부터 조선 소를 수입했으며, 소의 질병 전파를 막기 위해 검역 대책에 고심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 168쪽의 내용이다.

“근대에 있어서는 메이지 17년(1883년) 오이타현 사람 사토 이사고로와 시모노세키의 미치모리 만지로가 20~30두를 부산에서 수입한 것을 효시로 한다. (중략) 메이지 37년(1904년) 농상무성은 후쿠오카현 수입수역검역소(輸入獸疫檢疫所)를 설치하고 내지 축우의 옹호에 나섰는데 메이지 41년(1908년)에는 다시 2부 14현에 걸쳐 우역의 대유행을 보게 됨에 따라, 마침내 한국 정부에 대해 부산진에 이출우검역소의 건설을 교섭하였고 이로써 발본색원의 방책을 마련했다.”

지점장 ‘목흑은차’에 관한 ‘인사흥신(人士興信)’ ‘조선공로자(朝鮮功勞者)’ 등의 기록도 무척 상세하다. 1879년 도쿄에서 태어난 목흑은차는 1897년 조선으로 건너왔고, 1905년 조선흥업주식회사에 입사해 1925년 부산지점장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의 내력이 자세히 기록돼있다. 1935년 기록에도 지점장으로 되어있으니 회사의 신뢰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부인과 4남 3녀의 이름과 학벌까지 자세히 기록한 점을 볼 때 조선 수탈에 앞장섰던 주요 인물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돈야’라 불린 도매업 활황

돈야라고 부르던 도매업자들의 광고. 자료= 정삼철 연구위원

다른 두 개의 주식회사는 다양한 광고 문구와 삽화까지 넣어서 광고를 만들었다. 먼저 풍국제분주식회사 광고에는 사료를 만드는 소, 돼지, 말, 닭의 삽화와 함께 ‘꼭 이용 바란다’라는 당부의 문구를 넣었다. ‘왜 쌀까요?’라는 물음을 던져 놓고는 부산물 이용, 산지 다량 수입, 중간단계 생략, 신선하고 자양 풍부, 박리다매 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랑하고 있다.

일본운수기선주식회사는 ‘활우(活牛, 살아있는 소)’를 수송하는 전문회사임을 내세우며, “철선(鐵船) ‘닛조마루(日朝丸)’를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매달 10회 운항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일본운수기선주식회사와 닛조마루에 대한 자료는 부산세관박물관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19년부터는 운송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일본운수기선주식회사를 창립해, 가축전용 화물선인 540톤급 닛조마루를 건조해 한 번에 400~500마리를 싣고 갔다. 1910년 당시 부산검역소를 통해 일본으로 보낸 한우는 1312마리였으나, 10년 후인 1920년에는 3만6208마리, 일제 말기인 1939년에는 5만2586마리로 폭증했다.”

현재 북한지역인 진남포와 원산의 이출우 주식회사, 인천의 검역소사양관리부 광고 등은 반면(半面) 광고로 실렸다. 나머지 광고들은 ‘문옥(問屋,とんや, 돈야)’, 즉 도매상들이 낸 개인 광고로 업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일소로 부리다가 고기로 팔라”

민족문제연구소가 수집한 일지 식료회사의 일본 내 광고. 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이밖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수집한 자료 중에는 일지식료주식회사(日支食料株式會社)가 1920년대 초반 일본 현지에 낸 조선 소 광고가 있다. 광고 문안을 보면 조선 소의 효용 가치가 얼마나 큰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우는 하루에 3반보(反步, 300평)의 밭을 갈고, 200관적(貫積)의 짐수레를 끌고, 쌀 4표(俵, 가마니)를 지고, 비료와 송아지를 생산하며, 최후에는 고기소로 잡아도 사들인 가격보다도 훨씬 많은 부가가치가 있다.”

정삼철 충북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조선 소가 일본으로 대거 이출되니까 일본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지점을 내거나 아예 본사를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를 통해 관련이 있는 경제권을 독식했고, 수탈의 수단이 됐다”고 설명했다.

정삼철 연구위원은 “나중에는 관련 산업이 우피(牛皮, 소가죽)조달회사, 동물약품 제조회사 등으로까지 파생이 됐다”며 “우량 소를 키워서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작업이 치밀하고도 광범위하게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뉴스타파함께재단 KINN(한국독립언론네트워크)의 탐사보도 취재비 일부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보도를 끝으로 조선 이출우 관련 1차 취재를 마칩니다.

2차 취재는 “○○○○에 조선 소 들어와. 육식 꺼린 일본인들 사역 끝난 조선소 돌려보냈(보내려 했)다”, “일본 내 조선 우 비석이 있다”는 제보 등과 관련해 일본 현지 취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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